시(詩)/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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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골목 사람들시(詩)/이상국 2020. 4. 12. 12:21
나는 이 골목에 대하여 아무런 이해(利害)가 없다 그래도 골목은 늘 나를 받아준다 삼계탕집 주인은 요새 앞머리를 노랗게 염색했다 나이 먹어가지고 싱겁긴 그런다고 장사가 더 잘되나 아들이 시청 다니는 감나무집 아저씨 이번에 과장 됐다고 한 말 또 한다 왕년에 과장 한번 안해본 사람…… 그러다가 나는 또 맞장구를 친다 세탁소 주인여자는 세탁기 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나에게 들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피차 미안한 일이다 바지를 너무 댕공하게 줄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골목이 나에 대하여 뭐라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 골목 말고 달리 갈 데도 없다 지난밤엔 이층집 퇴직 경찰관의 새 차를 누가 또 긁었다고 옥상에 잠복하겠단다 나는 속으로 직업은 못 속인다면서도 이왕이면 내 차도 봐주었으면 한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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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아버지의 집으로 가고 싶다시(詩)/이상국 2019. 12. 3. 17:41
벌써 오래 되었다 부엌 옆에 마구간 달린 아버지의 집을 떠나 마당도 굴뚝도 없는 아파트에 와 살며 나는 그게 자랑인 줄 알았다 이제는 그 부드러운 풀이름도 거반 잊었지만 봄 둑길에 새 풀이 무성할 때면 우리 소 생각난다 어떤 날 저녁에는 꼴짐지고 돌아오는 아버지 늦는다고 동네가 떠나갈듯 우는 울음소리도 들었다 이제는 그 소도 아버지도 다 졸업했다고 이 도시의 시민이 되어 산지 오래인데도 우리 소 잘 먹던 풀밭 만나면 한 짐 베어지고 그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림 : 김대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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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마구간에서 보낸 겨울밤시(詩)/이상국 2019. 11. 14. 17:26
물 버리는 소리 끝이 버적버적 얼어붙는 겨울밤 우리는 고깃근이나 끊어 들고 작은 형님댁에 모였다 부엌에서는 메 짓는 여자들 잠 먹은 소리 잦아드는데 밤 깊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점에 백 원짜리 고스톱을 쳤다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날마다 까탈을 부린다고 형수는 입술을 빼물고 넌덜머리를 냈지만 형님은 초저녁부터 취해 있었다 - 야 동생아 쥐뿔두 없이 살아도 어머이 지사만은 보란 듯 모셔야지 하며 씨부렁거리는 그의 빠져버린 앞니 사이로 말이 샜다 - 몸 생각은 안 하우 - 이까짓 놈의 세상 마시다 죽으면 말지 뭐 이렇게 빗나가는 대답이 내겐 비명처럼 들렸다 이 설 쇠면 마흔 일곱, 화투판에서도 그는 껍데기든 똥이든 닥치는 대로 먹었지만 집안귀신이 사람 잡는다며 걸핏하면 피박을 쓰기 일쑤였다 이 방은 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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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밤길시(詩)/이상국 2019. 11. 12. 18:53
눈발이 날리는데 고한역에서 청량리행 기차를 탄다 밤차는 무덤처럼 적적하고 또 궁전처럼 화려하다 기차는 덜커덩거리며 강을 건너고 느닷없이 터널을 지나기도 하는데 막장 같은 어둠속에서 면사무소와 빨간 십자가와 작은 마을들이 모닥불처럼 환하게 피어올랐다가 사라지고는 한다 길이란 게 그렇다 초행이긴 하지만 가다보면 언젠가 한 번 간 적이 있는 것 같은 건 나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서 그럴 게다 칸칸마다 흐릿한 불빛 아래 어디서 본듯한 사람들이 더러는 고개를 떨군 채 잠들었고 또 어떤 이들은 이야기로 밤을 팬다 언제 이 길을 다시 갈 수 있을까, 혹은 집 나온 지 꽤 여러 날 된 것처럼 쓸데없이 쓸쓸해져서 지나가는 어둠을 향하여 나는 칸델라 불빛 같은 생각들을 흔들며 간다 기차는 춥다고 가끔 비명을 지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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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동면 화암리 박씨집 가을 아침시(詩)/이상국 2019. 9. 19. 16:05
예순다섯 첫새벽을 깨워 여물을 끓인다 펌프대 숫돌물에 살얼음이 잡히고 내륙의 새벽은 생철처럼 차다 된서리를 하얗게 뒤집어쓴 고추대궁들이 술꾼처럼 몸을 으슬뜨린다 자식을 있는 대로 업고 한뎃잠을 자고 난 옥시기들의 얼굴이 시퍼렇다 몸이 아주 식으면 그들은 이 집을 떠날 것이다 발 시렵다고 갈짓자처럼 날아가는 쥐똥만한 새들아 평생을 새벽부터 설쳤는데도 가을 마당엔 일이 꽉찼구나 털이 있는 대로 곧추세운 소가 콧김을 내뿜으며 애써 박씨와 눈을 맞추려 한다 "요즘 소들은 기계에게 일을 뺏기고 눈칫밥을 먹는다" 호박이 미처 무를 때를 기다리다 못해 마구간 빈자에 삐닥질해대는 소에게 그가 가래를 돋우며 망할 놈의 소새끼니 뭐니 욕세를 퍼대자 소도 혀를 빼물고 뭐라고 뿔질을 한다 닥나무 울타리를 빠져나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