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류근
-
류근 -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시(詩)/류근 2016. 9. 28. 14:00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 때문에 서로를 외롭게 하지 않는 일 사랑 때문에 서로를 기다리게 하지 않는 일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 때문에 오히려 슬픔을 슬픔답게 껴안을 수 있는 일 아픔을 아픔답게 앓아 낼 수 있는 일 먼 길의 별이여 우리 너무 오래 떠돌았다 우리 한 번 눈 맞춘 그 순간에 지상의 모든 봄이 꽃 피었느니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푸른 종 흔들어 헹구는 저녁답 안개마저 물빛처럼 씻어 해맑게 갈무리할 줄 아는 일 사랑 때문에 사랑 아닌 것마저 부드럽게 감싸 안을 줄 아는 일 이제 우리가 진실로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림 : 이영철 화백)
-
류근 - 나에게 주는 시시(詩)/류근 2016. 9. 23. 10:31
우산을 접어버리듯 잊기로 한다 밤새 내린 비가 마을의 모든 나무들을 깨우고 간 뒤 과수밭 찔레울 언덕을 넘어오는 우편배달부 자전거 바퀴에 부서져 내리던 햇살처럼 비로소 환하게 잊기로 한다 사랑이라 불러 아름다웠던 날들도 있었다 봄날을 어루만지며 피는 작은 꽃나무처럼 그런 날들은 내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사랑한 깊이만큼 사랑의 날들이 오래 머물러주지는 않는 거다 다만 사랑 아닌 것으로 사랑을 견디고자 했던 날들이 아프고 그런 상처들로 모든 추억이 무거워진다 그러므로 이제 잊기로 한다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일어서는 사람처럼 눈을 뜨고 먼 길을 바라보는 가을 새처럼 한꺼번에 한꺼번에 잊기로 한다 (그림 : 임윤숙 화백)
-
류근 - 머나먼 술집시(詩)/류근 2016. 6. 29. 21:55
요 몇 달 사이에 나는 피해서 돌아가야 할 술집이 또 두 군데 더 늘었다 없던 술버릇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갈 수 없는 술집들도 하나씩 늘어난다 그저께는 친하게 지내오던 사채업자와 싸우고 어젯밤엔 학원 강사 하는 시인과 싸우고 오늘은 술병 때문에 일요일 하루를 낑낑 앓는 일에 다 바친다 억울하다 갈 수 없는 술집이 늘어날 때마다 나는 또 술 생각이 난다 맨 정신일 때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내 선량한 자존심 하지만 그들은 왜 하필 술 마실 때에만 인생을 가르치려는 것인가 술자리에서만 별안간 인생이 생각나는 것인가 억울하다 술 마실 때에만 불쑥 자라나는 인생이여 술에서 풀려나면 다시 모른 체 껴안고 살아버려야 할 적이여 술집이여 그 모든 안팎의 상처들이여 갈 수 없는 술집이 늘어날 때마다 나는 또 술 생각..
-
류근 - 폭설시(詩)/류근 2016. 2. 16. 20:51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한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그림 : 김영근화백)
-
류근 - 반가사유시(詩)/류근 2015. 8. 15. 11:28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함석 간판 아래 쪼그려 앉아 빗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여자와 어디로도 함부로 팔려 가지 않는 여자와 애인 생겨도 전화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와 나이롱 커튼 같은 헝겊으로 원피스 차려입은 여자와 현실도 미래도 종말도 아무런 희망 아닌 여자와 외항선 타고 밀항한 남자 따위 기다리지 않는 여자와 가끔은 목욕 바구니 들고 조조영화 보러 가는 여자와 비 오는 날 가면 문 닫아 걸고 밤새 말없이 술 마셔주는 여자와 유행가라곤 심수봉밖에 모르는 여자와 취해도 울지 않는 여자와 왜냐고 묻지 않는 여자와 아,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저문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 맞아서 저물..
-
류근 - 무늬시(詩)/류근 2015. 1. 27. 20:24
그대를 사랑할 때 내 안에 피어 나부끼던 안개의 꽃밭을 기억합니다. 세상에 와서 배운 말씀으로는 이파리 하나 어루만질 수 없었던 안타까움으로 나 그대를 그리워하였습니다. 나무들이 저희의 언어로 잎사귀마다 둥글고 순한 입술을 반짝일 때 내 가슴엔 아직 채 이름 짓지 못한 강물이 그대 존재의 언저리를 향해 흘러갔습니다. 마침내 나는 그대 빛나는 언저리에 이르러 뿌리가 되고 꽃말이 되고 싶었습니다. 내 꽃밭의 향기와 강물의 깊이를 넘어 밤이 오고 안개를 적신 새벽이 지나갔습니다. 내 그리움은 소리를 잃은 악기처럼 속절없는 것이었으나 지상의 어떤 빛과 기쁨으로도 깨울 수 없는 노래의 무늬 안에 꿈꾸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썩어 이룩하는 무늬, 이 세상 모든 날개가진 목숨들의 무늬, 그 아프고 투명한 무늬를 나는 ..
-
류근 - 두물머리 보리밭 끝시(詩)/류근 2014. 12. 25. 10:07
해 질 무렵 두물머리 보리밭 끝에는 바라볼 때마다 추억까지 황홀해지는 노을이 있고 아무렇게나 건네주어도 허공에 길이 되는 가난한 시절의 휘파람 소리가 있고 녹슨 십자가를 매단 채 빨갛게 사위어가는 서쪽 마을 교회당 지붕들마저 저물어 있다 나는 자주 그 길 끝에서 다정한 생각들을 불러 모으고 구름은 기꺼이 하루의 마지막 한때를 내 가벼워진 이마 위에 내려놓고 지나갔다 언제나 나는 그 보리밭 끝에 남겨졌지만 해 질 무렵 잠깐씩 잔잔해지는 저녁 물살을 바라보며 생애의 마지막 하루처럼 평화로웠다 쓸쓸한 시절은 진실로 혼자일 땐 동행하지 않는 법이었다 바람의 길을 따라 보리밭이 저희의 몸매를 만들 때 나는 길 끝에 서서 휘파람 뒤에 새겨진 길을 천천히 따라가거나 물소리보다 먼 세월을 바라보았을 뿐 거기선 오히려 ..
-
류근 - 그리운 우체국시(詩)/류근 2014. 12. 25. 10:06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은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