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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근 - 무늬
    시(詩)/류근 2015. 1. 27. 20:24



    그대를 사랑할 때 내 안에 피어 나부끼던 안개의 꽃밭을 기억합니다.

    세상에 와서 배운 말씀으로는 이파리 하나 어루만질 수 없었던 안타까움으로 나 그대를 그리워하였습니다.

    나무들이 저희의 언어로 잎사귀마다 둥글고 순한 입술을 반짝일 때

    내 가슴엔 아직 채 이름 짓지 못한 강물이 그대 존재의 언저리를 향해 흘러갔습니다.

    마침내 나는 그대 빛나는 언저리에 이르러 뿌리가 되고 꽃말이 되고 싶었습니다.

    내 꽃밭의 향기와 강물의 깊이를 넘어 밤이 오고 안개를 적신 새벽이 지나갔습니다.

    내 그리움은 소리를 잃은 악기처럼 속절없는 것이었으나

    지상의 어떤 빛과 기쁨으로도 깨울 수 없는 노래의 무늬 안에 꿈꾸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썩어 이룩하는 무늬, 이 세상 모든 날개가진 목숨들의 무늬, 그 아프고 투명한 무늬를 나는 기뻐하였습니다.

    그대를 사랑할 때 비로소 나는 기쁨의 사람으로 피어 오래도록 반짝일 수 있었습니다.

    봄날이어도 좋았고 어느 가난한 가을날이어도 좋았습니다.

    그대 더 이상 내 사랑 아니었을 때 내 꽃밭은 저물고 노래의 강물 또한 거기쯤에서 그쳤습니다.

    문득 아무런 뜻도 아닌 목숨 하나 내 것으로 남아서 세상의 모든 저문 소리를 견디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지막 한 방울의 절망조차 비워내는 일이었으므로

    내겐 내 순결한 슬픔을 묻어 줄 어떠한 언어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눈물마저 슬픔의 언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 늦게서야 깨달아 버린 것이었습니다.

    날마다 바람이 불고 계절이 바뀌었습니다.

    그대를 사랑할 때 내 안에 피어 나부끼던 안개의 꽃밭을 나 너무 오래도록 기억합니다.

    내 목숨에 흘러가 있는 기억의 저 아득한 무늬 위에 이제는 그대를 놓아주고 싶습니다.

    그리고도 남은 목숨이 있거든 이쯤에서 나도, 그치고 싶습니다.

    스스로 소리를 버리는 악기처럼 고요하고 투명한, 무늬가 되고 싶습니다.

    (그림 : 이존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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