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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두물머리 보리밭 끝시(詩)/류근 2014. 12. 25. 10:07
해 질 무렵 두물머리 보리밭 끝에는
바라볼 때마다 추억까지 황홀해지는 노을이 있고
아무렇게나 건네주어도 허공에 길이 되는
가난한 시절의 휘파람 소리가 있고
녹슨 십자가를 매단 채 빨갛게 사위어가는
서쪽 마을 교회당 지붕들마저 저물어 있다나는 자주 그 길 끝에서 다정한 생각들을 불러 모으고
구름은 기꺼이 하루의 마지막 한때를
내 가벼워진 이마 위에 내려놓고 지나갔다
언제나 나는 그 보리밭 끝에 남겨졌지만
해 질 무렵 잠깐씩 잔잔해지는 저녁 물살을 바라보며
생애의 마지막 하루처럼 평화로웠다
쓸쓸한 시절은
진실로 혼자일 땐 동행하지 않는 법이었다바람의 길을 따라 보리밭이 저희의 몸매를 만들 때
나는 길 끝에 서서 휘파람 뒤에 새겨진 길을
천천히 따라가거나 물소리보다 먼
세월을 바라보았을 뿐거기선 오히려 아무것도 그립지 않았다
아무것도 그립지 않은 사람으로 느리게 저물어서
비로소 내 눈물은 스스로 따스한 뉘우침이 되고
물소리는 점점 더 잔잔한 평화가 되고
서쪽으로 불어가는 생각들과 함께 나는
노을보다 깊어진 눈시울로 길 끝에 서서
아직 잊혀지지 않은 것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생애의 마지막 하루처럼
두물머리 보리밭 끝에 날이 저물 때
멀리 가는 물소리와 함께
어디로든 한꺼번에 저물고 싶었다 아무것도
그립지 않았다(그림 : 박준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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