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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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축시시(詩)/류근 2021. 2. 5. 08:01
내가 당신을 귀하게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지길 바랍니다 내 가장 아픈 곳을 밝혀 사랑한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깊은 사랑의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지나간 날들이 당신에게 슬픔의 기록으로 남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고통과 자기 연민의 도구로 쓰이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아무런 기억도 추억도 아니길 바랍니다 어떤 계절에 내린 비 어떤 가을날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쯤의 일로 고요하게 지나간 날들이길 바랍니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겠습니다 내 기도가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은 당신의 기도로 나는 나의 기도로 서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살아서 다시는 서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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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옛날 바다시(詩)/류근 2020. 3. 11. 17:23
옛날 열차를 타고 옛날 바다에 가고 싶다. 응달도 별자리도 없이 옛날만 있는 바다. 사랑도 편지도 문패도 모두 옛날에만 있어서 하나도 아프지 않은 바다. 갈매기와 파도마저 옛날 쪽으로 고개를 숙이는 바다. 옛날의 애인이 울어주는 바다. 가만가만 울음을 들어주는 바다. 옛날 바다에 가고 싶다. 옛날의 모래와 햇볕이 성을 쌓는 바다. 무너져도 다시 쌓으면 그만인 바다. 빨간 우체통이 서 있는 바다. 이별마저 옛날에 다 지나간 바다. 이별마저 옛날에 다 잊히고 잊힌 바다. 이별마저 왔다가 옛날로 가 버린 바다. 옛날 열차를 타고 옛날 바다에 가고 싶다. 그 어떤 약속도 옛날이 돼 버린 바다. 그래서 이제는 지킬 수 없는 약속만 떠도는 바다. 내가 데리고 간 상처가 가만가만 양말을 벗는 바다. 모든 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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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고독의 근육시(詩)/류근 2018. 10. 16. 11:40
내게서 한 걸음도 달아나지 못하고 일없이 왔다 가는 밤과 낮이 아프다 며칠씩 눈 내리고 길은 홀연 내 안의 굽은 등성이에서도 그쳐 여기서 바라보면 아무런 뜻도 아닌 열망과 그 너머 자욱한 추억의 첩첩 도끼 자국들 내 안의 저 게으른 중심에 집도 절도 없이 가로누운 뼛조각 환하고 이제 어디로든 흘러가 몸 풀고 싶은 옛사랑 여기 참 어둡고 변방까지 몰린 시간이 오래도록 누워 사는 생각의 지붕들 위에 낮은 키로 쌓인다 눈 맞은 나무들이 고스란히 제 생애의 무게를 향해 손을 내밀 때 어디로도 향하지 못한 존재의 저, 광활한 배후 (그림 : 김종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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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문득 조금 억울한 인생시(詩)/류근 2018. 6. 10. 17:42
출근길이 꼼짝도 않는다 지렁이 보폭보다 짧게 주춤주춤 엎질러지다 보면 저만치서 무슨 바구니 같은 데 올라타서 가로수 전지 작업하는 구청 용역 인부들 아침부터 길을 막고 저 지랄이냐, 하다 말고 가만 생각해보니 나보다 나무가 상전이다 출근도 명퇴도 없이 제자리에 멈춰 서서 죽는 날까지 사람들 용역으로 부리며 세금으로 몸치장하는 상전들 국회의원 같은 자세로 일없이 서서 흙과 빗물과 햇빛과 바람까지 소집해 보좌관 거느리듯 앵벌이로 내세우는 하느님 마름 같은 불한당 놈들 저놈들 먹여 살리자고 나는 아침부터 길 위에 꼼짝도 못 하고 선 채 결국 나무 대신 사방팔방 삿대질이나 하고 이 지랄인가 근로소득세, 주민세, 고용보험료 벌러 가지 못해 쓰지도 못할 발암물질이나 푸들푸들 푸르르르 엽록소처럼 합성해내고 있단 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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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첫눈 인사시(詩)/류근 2017. 12. 5. 23:09
첫눈 오시는데. 이 눈 소식 전할 사람 없어. 혼자 서성거렸어요. 그대 지금 어디에 계시더라도. 부디 제가 남긴 발자국 무늬 따라. 마음의 길 평화로우시길요. 깊이 깊이 평안하시길요.. 어느 전생쯤 우리도. 세상에 오는 첫눈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감사해 했던 적 있었겠지요. 시린 눈썹 위에 눈송이 하나쯤 얹어 두고 서로의 이마를 바라본 적 있었겠지요.. 지금 비록 안부 한 잎. 그대에게 불어가지 않더라도 살아서 보는 첫눈 속에 그대 이름 반짝였으니. 이 부드러운 통증으로 저는 또 한 세상 건너가겠습니다. 더러는 제 그리움도 그대 눈시울에 첫눈처럼 흩날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슬픔은 말고. 눈송이 하나 만큼의 무게로만 흩날리다 스르르 녹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림 : 남택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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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칠판시(詩)/류근 2017. 3. 8. 19:16
당신이 알아볼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큰 글씨로 내 이름을 써두곤 했다 당신만 알아볼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깊어진 글씨로 내 이름을 써두곤 했다 나 혼자 노을 속에 남겨져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당신 맨 처음 바라보라고 서쪽 하늘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청동의 별 하나를 그려두기도 하였다 때로는 물의 이름을 때로는 나무의 이름을 때로는 먼 사막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지붕이 자라는 밤이 와서 하늘이 내 입술과 가까워지면 푸른 사다리 위에 올라가 가장 깨끗한 언어로 당신의 꿈길을 옮겨 적기도 하였다 내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물고기 한 마리 우산을 쓰고 지평선을 넘어오는 자전거 하나 밤과 새벽을 가르는 한 올의 안개마저 돌아와 아낌없이 반짝이곤 했다 아무도 그 이름 부르지 말라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