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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근 - 칠판
    시(詩)/류근 2017. 3. 8. 19:16

     

    당신이 알아볼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큰 글씨로 내 이름을 써두곤 했다
    당신만 알아볼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깊어진 글씨로
    내 이름을 써두곤 했다

     

    나 혼자 노을 속에 남겨져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당신 맨 처음 바라보라고
    서쪽 하늘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청동의 별 하나를 그려두기도 하였다
    때로는 물의 이름을
    때로는 나무의 이름을
    때로는 먼 사막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지붕이 자라는 밤이 와서
    하늘이 내 입술과 가까워지면
    푸른 사다리 위에 올라가 가장 깨끗한 언어로
    당신의 꿈길을 옮겨 적기도 하였다


    내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물고기 한 마리
    우산을 쓰고 지평선을 넘어오는 자전거 하나
    밤과 새벽을 가르는 한 올의 안개마저
    돌아와 아낌없이 반짝이곤 했다


    아무도 그 이름 부르지 말라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글씨로 당신 이름을 쓰기도 했다
    아무도 그 이름 알아보지 못하도록
    세상에 없는 글씨로 당신 이름을 쓰기도 했다


    날마다 뼈를 허물어 등불을 매달았으나
    당신 한 번도 내가 쓴 말을 보지 못했다
    빈 정거장에 나아가 눈이 먼 은행나무처럼
    그토록 가깝고 먼 자리에
    무성히 가지를 뻗은 지우개가 늘 있었다

    (그림 : 한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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