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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 보수동 헌책방 골목시(詩)/이규리 2019. 10. 5. 15:04
헌책방 골목에 들어서면 말린 시래기 냄새가 난다
허드레지만 쓸 만해서
버린 과거를 주워 누군가 차곡차곡 난전을 펴놓은 곳
밀려난 전처들 모습이 조금은 기품을 자랑하고 있다
양은 다라이에 삥 둘려놓은 순대 속 같은 길,
보수가 필요 없는 길
시름시름 닳은 사람 냄새 배이고 배여
손때 묻은 이건 몇 순배나 돌았는지
책이 사람이란 말은 여기서 나왔는데
간혹 이마를 수그리고 골목으로 들어서는 몇몇 사람
눈과 손이 동시에 더듬어 뽑는 것,
재혼처럼, 얼마쯤은 담보한 새로움이거나
덤으로 얻은 기쁨이거나 간에
기죽지 않아서 좋고
또 쬐끔은 지적이어서 좋고
그런 다음, 식은 순대 하나 입에 넣은 적 없는데
내 창자가 훈훈해 오는지
괜히 표정이 넓어지는지
이 골목이 내장이 일순 위로 가는 계단만 같아서
보수동책방골목 : 부산 국제시장 입구 대청로사거리 건너편에서 보수동 쪽으로 나 있는 좁은 골목길에 책방들이 밀집되어 있는데
이곳을 보수동책방골목이라 한다.
한국전쟁 당시 많은 피난민들은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어려운 삶을 이어가고 있었고,
부산소재 학교는 물론 피난 온 학교까지 구덕산 자락의 보수동 뒷산에서 노천교실·천막교실 등을 열어 수업을 하였다.
이에 보수동 골목길은 수많은 학생들의 통학로로 붐비게 되었다.
다른 피난민들이 가세하여 노점과 가건물에 책방을 하나둘 열어 책방골목이 형성되었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수많은 학생과 지식인들이 자신의 책을 내다 팔고, 헌책을 구입하며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신학기가 되면 북새통을 이루었으며 때때로 희귀본이나 값진 개인소장 고서도 흘러들어와
지식인 수집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림 : 박경효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