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강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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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 저물 무렵시(詩)/강은교 2014. 5. 12. 00:56
저물 무렵 네가 돌아왔다 서쪽 하늘이 열리고 큰 무덤이 보이고 떠나가는 몇 마리의 새 식구들은 다시 안심한다 곧 이불을 펴리라 지난해를 다 바쳐 마련한 삼베이불이 곳곳에서 펴지리라 나는 헌옷을 벗고 낡은 피는 수채구멍에 버린다 곁눈질로 우는 피의 기쁨 뒤뜰에선 오랜만에 꽃잎 떨어지는 소리 마지막 꽃잎도 떨어지고 나면 더 무엇이 살아서 떨어지겠는가 서쪽 하늘이 열리고 네가 돌아왔다 살아 있는 것 모두 물이 되도록 물 끝에 거품으로 일 때까지 성실한 너는 또다시 오라. (그림 : 김영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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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 사랑법시(詩)/강은교 2014. 5. 12. 00:49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있는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그림 : 김윤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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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 파도시(詩)/강은교 2014. 3. 26. 12:46
떠도는구나 오늘도 동편에서 서편으로 서편에서 동편으로 물이 되어 물로 눕지 못하는구나. 꿈꿀 건 온몸에 솟아나는 허연 거품뿐 거품 되어 시시때때 모래땅 물어뜯으며 입맞추며 길길이 수평선 되러 가는구나. 떠돌며 한 바다 막으러 가는구나. 누가 알리 엎드려야만 기껏 품에 안아 보는 세상 날선 바람떼 굽은 잔등 훑고 가면 쓰러져 내리는 길, 길 따라 사랑이 얼마만 하더냐, 묻는 먼지알 신음소리 목숨의 길이 얼마만 하더냐, 묻는 먼지알 신음소리 등덜미에 철썩철썩 부서져 떠도는구나 오늘도 동편에서 서편으로 서편에서 동편으로 물이 되어 물로 눕지 못하는구나. 아, 이 벽에서 저 벽 저 벽에서 이 벽 끝내 거품 되어 피 넘쳐 넘쳐 수평선이 흐느끼는구나 흐느끼며 한 세상 거품 속에 세우는구나. (그림 : 박철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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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 물길의 소리시(詩)/강은교 2014. 2. 20. 16:28
그는 물소리는 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렇군, 물소리는 물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 물이 바위를 넘어가는 소리, 물이 바람에 저항하는 소리, 물이 바삐바삐 은빛 달을 앉히는 소리, 물이 은빛 별의 허리를 쓰다듬는 소리, 물이 소나무의 뿌리를 매만지는 소리…… 물이 햇살을 햝는 소리, 핥아대며 반짝이는 소리, 물이 길을 찾아가는 소리…… 가만히 눈을 감고 귀에 손을 대고 있으면 들린다. 물끼리 몸을 부비는 소리는 소리가. 물끼리 가슴 흔들며 비비는 소리가. 몸이 젖는 것도 모르고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의 비늘 비비는 소리가…… 심장에서 심장으로 길을 이루어 흐르는 소리가. 물길의 소리가. 물길의 소리가. (그림 : 장태묵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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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 흰 눈 속으로시(詩)/강은교 2014. 2. 10. 10:17
여보게, 껴안아야 하네 한 송이 눈이 두 송이 눈을 껴안듯이 한데 안은 눈송이들 펄럭펄럭 허공을 채우듯이 여보게, 껴안아야 하네 한 조각 얼음이 두 조각 얼음을 껴안듯이 한데 안은 얼음들 땅 위에 칭칭 감기듯이 함께 녹아 흐르기 위하여 감기듯이 그리하여 입맞춰야 하네 한 올 별빛이 두 올 별빛에 입맞추듯이 별빛들 밤새도록 쓸쓸한 땅에 입맞추듯이 눈이 쌓이는구나 흰 눈 속으로 한 사람이 길을 만들고 있구나 눈길 하나가 눈길 둘과 입맞추고 있구나 여보게, 오늘은 자네도 눈길 얼음길을 만들어야 하네 쓸쓸한 땅 위에 길을 일으켜야 하네. (그림 : 신재흥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