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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영숙 - 동백피다
    시(詩)/허영숙 2017. 1. 26. 16:29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에는 내가 즐겨듣는 노래가 있지

    노래가 나오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해마다 바람이 그려놓은 악보들이 마당에 두껍게 쌓여 있지

    바랭이, 개망초의 전주곡이 끝난 자리에 이름 모를 풀꽃들이 스스로 지닌 음계를 타고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피었다 지고

    도돌이표를 따라 한 무리의 별들이 쏟아져 내리며 합창을 들려주기도 하지


    나만 아는 그 집에는 오래 전 당신이 부르던 노래가 있었지

    노래가 흘러나오던 입술을 열고 들어서면 잡풀만 무성한 마당,

    저음 또는 고음이 가진 당신과 나의 불안한 옥타브를 베어버린 킬링필드,

    그 들판에 우리의 노래는 이미 죽고 남은 몇 음절의 노래가 미완으로 남아 있지

    달빛만 조명처럼 출렁이었다 사라지는 빈 무대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당신의 노래를 기다리고 있던 겨울 날


    집과 집의 경계를 깔고 앉아 당신의 지문이 묻은 악보를 뒤적이는데

    성성 날리는 눈발이 피날레를 예고하더니

    담벼락 밑에 서 있던 늙은 가수 하나가 목울대를 세우고 붉은 노래를 낭창낭창 부르기 시작했지

    그 틈을 타고 오래 가두어둔 한 음절을 기침이 쏟아지도록 따라 불렀지

    눈발 속에 당신이 붉게붉게 피고 있었지

    (그림 : 이숙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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