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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숙 - 저물녘 억새밭에 가다시(詩)/허영숙 2015. 10. 24. 15:35
억새밭에 쪼그리고 앉으면
허공으로 난 빽빽한 길 위에 선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이 지워지는 저물녘에는
무수한 저 길도 서러워져서 온 몸을 흔든다
잔광 속으로 하얗게 번지는 울음
흔들릴수록 울음은 더 멀리 번져나가서
저물녘을 예감한 모든 억새가
어둠을 머리끝까지 쓰고 운다
울음으로 들썩이는 들녘
시들어가는 볕에 서 본 적 없는
마디 푸른 것들은 다 듣지 못하는 저 소리
저물어 간 모든 것들은 갈피마다 울음을 품고 있다
저녁에는 사람이 낸 길도 저물어서
슬픔이 서리서리 얹힌 시절을 불러낸다
먼데서부터 빈 대궁을 채우며 오는 기억
그속에는 이제 그만 저물자는 당신의 말에
발목을 접질리며 돌아오던 저녁이 있다
대궁 속에 흥건하게 차오르던 울음을
이불 밑에서 하얗게 흘려보낸 시절이 있다
푸른 길이 아득히 저물어 갈 때
멀리 간만큼 되돌아와야 하는 길은 더 멀고 아파서
어둠은 사람의 발자국부터 천천히 지우며 온다
(그림 : 박양예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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