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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영숙 - 모란꽃살문
    시(詩)/허영숙 2015. 4. 24. 10:07

     

    봄을 함께 거느리던 붉은 모란,
    아주 오래 소식 없어 먼 바깥에서 잘 피고 있겠거니 여긴 그 모란, 절집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시간의 풍상을 맞는 동안 꽃의 단청은 버렸으나
    얇은 창호지 한 장 사이에 두고 바람과 햇살을 걸러 들여 낯빛이 고고하다

    모란의 손을 잡고 한창 피었을 때 가졌던 지란지교의 날을 들추는데

    꽃술 안쪽의 청명한 세계가 따뜻하게 건너온다.

    버려서 낡아가는 것이 아니라 경전에 새로운 꽃말을 새기고 있는 모란,

    창호지 너머 어간으로 내린 모란의 뿌리는 깊고도 단단하다

    평생 결가부좌로 여기에 피어있을 모란을 나는 붉은 꽃으로만 읽으려 하고

    모란은 내 외진 기슭까지 읽으니

    아직 세속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해 내게는 너무 낯선 모란,

    절집을 나서는 등 뒤에서 잿빛 소맷자락 사이 희고 여린 손으로 합장하는 모란, 

    그만 마음이 소슬하여 세 걸음 가다 돌아봐도 모란, 돌계단 아래서 또 돌아봐도 모란,

    꽃물 져도 모란은 아직 모란,
    내게는 평생 붉을 모란

    어간 - 법당의 중앙 통로

    (그림 : 이혜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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