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명윤
-
이명윤 - 동백시(詩)/이명윤 2014. 1. 17. 19:22
별들이 다시 지상에 왔다 눈 먼 바람의 시린 손이 마을을 더듬는 아직도 이곳은 위험한 계절이다 서로를 믿었으므로 개의치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눈 속에 묻힌 오래된 말들이 하나 둘 눈을 뜬다 너는 지상에서 꽃이라 불리지만 바람 앞에 맨살로 피어나는 것은 꽃이 아니라 신념인 것 신념은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또 다시 두 겹 세 겹 포위해 오는 겨울 앞에 부릅뜬 눈동자로 선 너는 곧 우수수 목소리가 잘려나갈 위험한 사랑이다 봄으로 가는 암호를 스스로 찢어 깨물은 붉은 입술은 네 순결한 사랑의 증표인 것을 감히 누가 사랑을 진압하였다 말하는가 해마다 망각을 찢고 불쑥 불쑥 세상을 겨누는 저 붉은 총구 앞에 (그림 : 이완호 화백)
-
이명윤 - 홍합시(詩)/이명윤 2014. 1. 17. 19:19
바람이 세찬 날 시장에서 사온 홍합을 씻어 냄비에 담는다 몸 전체가 굳게 다문 입이다 바글바글 뜨거운 냄비 속에서 결국 참았던 입을 연다 쩍, 쩍, 쩍, 비밀의 화원이 열리고 단 한 번도 발설하지 않았던 혀가 웅크린 채 서느런 웃음을 피우고 있다 식구들이 식탁에 앉아 홍합을 먹는다 처얼썩, 처얼썩, 먼 바다가 쉴 새 없이 창문을 두드린다 식구들은 비밀 하나씩 가지고 있다 홍합을 먹으며 모두들 한 숟갈의 고백이 얼마나 속 시원한 것임을 안다 그리하여 국물에 대한 칭찬을 한마디씩 거들었지만 봉분처럼 쌓여가는 빈 껍질을 보며 그들의 눈빛은 서로가 모르게 희번덕거렸다 검은 입들이 둘러 앉아 조용히 홍합을 먹는 저녁 쉿, 발설하면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