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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세찬 날
시장에서 사온 홍합을 씻어 냄비에 담는다
몸 전체가 굳게 다문 입이다
바글바글 뜨거운 냄비 속에서
결국 참았던 입을 연다
쩍, 쩍, 쩍, 비밀의 화원이 열리고
단 한 번도 발설하지 않았던 혀가
웅크린 채 서느런 웃음을 피우고 있다
식구들이 식탁에 앉아 홍합을 먹는다
처얼썩, 처얼썩, 먼 바다가 쉴 새 없이 창문을 두드린다
식구들은 비밀 하나씩 가지고 있다
홍합을 먹으며 모두들 한 숟갈의 고백이 얼마나 속 시원한 것임을 안다
그리하여 국물에 대한 칭찬을 한마디씩 거들었지만
봉분처럼 쌓여가는 빈 껍질을 보며
그들의 눈빛은 서로가 모르게 희번덕거렸다
검은 입들이 둘러 앉아 조용히 홍합을 먹는 저녁
쉿,
발설하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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