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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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윤 - 손맛시(詩)/이명윤 2016. 5. 1. 15:26
식당에서 찌개를 먹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누군가 이십 년 된 손맛이라 일러주었다 끄덕끄덕 주방 아주머니 손을 훔쳐보았다 식당 마루에 세 살 남짓 아이가 걸어가더니 화분의 몽돌을 집어든다 누구 손맛인지 예쁘게 키웠다 매일 기저귀 갈아주고 이불 덮어주고 먹여주고 닦아주고 업어주고 쓰다듬으며 키웠을 손을 생각해 보는 것인데 몽돌이 떼굴떼굴 구른다 부드러운 저 몽돌은 어느 바닷가 파도의 오래된 손맛이다 후식으로 나온 사과도 비와 바람과 햇빛의 손맛이고 사과나무 돌보던 농부의 손맛이다 손바닥을 펴본다 손안의 세상이 미지의 눈으로 꿈틀거린다 길가 벚나무의 수많은 손가락이 꽃눈을 밀어올리던 맛있는 봄날 전화가 왔다 바빠도 밥은 꼭 챙기 묵그라 수화기에서 나온 어머니 손이 물비늘처럼 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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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윤 - 가을을 보내는 법시(詩)/이명윤 2016. 5. 1. 15:18
홀아비 최가 저 양반 막걸리 단지 채 마시더니 군청 마당 쌓은 나락에 불을 지르고는 다시는 농사짓나 봐라 시펄놈들 다 때려치울 듯 서슬 한번 퍼렇더니 언제 쟁기 들고 들에 나갔노 그 많던 소 새끼 다 팔아 치우고 달랑 저 눈만 멀뚱멀뚱 늙은 소 남아 짠한 마음에 죽은 지 마누라보다 더 아껴준다며 외양간도 다시 고치고 늘 싱싱한 풀만 골라 멕이고 요리조리 씻어도 준다며 저것 봐라 뒤에 가는 최가가 미안타 미안타 하니 앞에 가는 늙은 소가 괜찮소 괜찮소 하네 한 줄 또 한 줄 논두렁을 밀고 가네 툭 불거진 돌부리에 취기가 걸려 넘어져도 뒤집힌 벼 밑동 마다 흙 가슴이 춤을 추면 또 냉큼 일어나 뚜벅 뚜벅 걸어가네 늙은 소가 서면 최가도 서고 최가가 가면 늙은 소도 가네 멀리 소방차 사이렌 소리 들려오고 억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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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윤 - 일용직 정씨의 봄시(詩)/이명윤 2016. 5. 1. 15:14
벚꽃 가득한 풍경을 파일에 담는다 휴대폰을 여는 순간 (봄이다) 부르튼 입술이 봄을 한입 베어 물면 당신 잠시나마 봄이 되지 않을까 한가하게 봄 타령이라니요 어쩌면 쓴웃음 짓겠지만 언제 또 다른 일 찾아야 할지 모를 불안이 습관적으로 피고 지는 저녁 밥이 되지 못하는 봄이란 사치스런 감성으로 피고 지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길 가 벚나무의 수많은 입이 터뜨리는 환한 웃음에 저게 다 출근도장이면 저게 다 밥이면 좋겠네 당신 잠깐의 미소로 행복할 수 있다면 봄이 그저 당신의 얼굴을 스쳐가는 가벼운 은유로 머물지라도 늦은 밤 찬밥을 얹은 숟가락위에 꽃잎 한 장 올려주고 싶네 (계약기간을 연장합니다) 기다리던 통보가 오지 않는 당신의 저녁 계약하지 않아도 매년 찾아오는 봄 당신이 잃어버린 봄날의 한 컷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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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윤 - 항남우짜시(詩)/이명윤 2016. 5. 1. 15:10
당신은 늘 우동 아니면 짜장 왜 사는 게 그 모양인지 시대적 교양 없이 물어보지 않을게요 그래요, 그래서 우짜라구요 우동이냐 짜장이냐 이제 피곤한 선택은 끝장내 드리죠 짜장에 우동 국물을 부어 태어난 우짜 단짝 같은 메뉴끼리 사이좋게 가기로 해요 화려한 풀코스 고급요리 식당이 진을 친 항남동 눈치 볼 것 있나요 뒷골목 돌아 친구처럼 기다리는 항남우짜로 오세요 꿈틀대는 이마 주름에 꾸깃한 작업복 당신도 면발계층이군요 면발처럼 긴 가난을 말아 올려요 입가에 덕지덕지 짜장웃음 바르고 우동처럼 후루룩 웃어 보세요 후딱 한 그릇 비우고 큰 걸음으로 호주머니의 설움을 빠져 나가야죠 달그락 우동그릇 씻는 소리 가난한 날의 저녁이 달그락 달그락 쉴 새 없이 몰려와요 아저씨 또 오셨네요, 여기 우짜 한 그릇이요 꼬깃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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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윤 - 당신의 골목시(詩)/이명윤 2016. 1. 27. 21:03
그곳이 지도에 없는 이유는 햇볕이 잘 들지 않기 때문이죠 얼굴을 맞댄 오래된 집들은 그 자리에서 늙어가죠 혹자는 부질없는 집착이라고 하지만요 골목을 벗어나지 못하는 당신, 가끔은 누가 볼까 휘파람을 불지만 소리는 그림자를 춤추게 하죠 꿈틀꿈틀 일어나는 기억, 슬금슬금 쫓아오는 골목, 뒤돌아보는 당신, 허름한 창문 틈새로 슬픔이 불빛처럼 새어 나오고 개 짖는 소리에 골목이 가늘어져도 두려워 마세요 골목의 병명은 지도에 나타나지 않아요 늘 웅크려 자는 당신 오래된 골목 하나 품고 사는 당신 십년 혹은 이십 년 전 어디쯤 쓰러져 있는 당신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골목아, 라고 불러보세요 골목은 엎어져도 골목, 무르팍이 깨어져도 또 다시 훌훌 털고 일어나 가고 있지요 무심하게도 다시 뒤돌아 걷지 않는 한 골목은 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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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윤 - 누룽지시(詩)/이명윤 2016. 1. 25. 19:13
하늘 천 따지 가마솥에 누룽지 눌러 붙은 얼굴들 푹푹 찌는 압력밥솥은 모르지 가난이 얼마나 고소한 소리를 내는지 숟가락으로 빡빡빡 너도나도 맛있는 간식 부릉부릉 누룽지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어도 누룽누룽 누룽지 엄마 속만 빡빡 긁었나 밥솥도 빡빡 긁었지 긁어도 긁어도 끌끌 웃던 밥솥의 누룽지 부릉부릉 유년의 누룽지 누룽누룽 사랑의 누룽지 누군가 말했지 영어로 바비브라운이라고 밥이 갈색이란 말씀 정우영시인은‘밥이부러운’이라 했지 그래 맞아 밥이 부러운! 밥이 그리운 누룽지 일곱 식구 우르르 달려들면 남지 않던 밥 썰물처럼 허전하게 줄어들던 밥 고소하게 나눠 먹던 부릉부릉 누룽지 오랫동안 아껴 먹던 누룽누룽 누룽지 말라붙은 당신의 눈물 같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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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윤 -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시(詩)/이명윤 2014. 10. 7. 19:46
내 마음의 강가에 펄펄, 쓸쓸한 눈이 내린다는 말이다 유년의 강물냄새에 흠뻑 젖고 싶다는 말이다 곱게 뻗은 국수도 아니고 구성진 웨이브의 라면도 아닌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나 오늘, 원초적이고 싶다는 말이다 너덜너덜 해지고 싶다는 뜻이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도시의 메뉴들 오늘만은 입맛의 진화를 멈추고 강가에 서고 싶다는 말이다 어디선가 날아와 귓가를 스치고 내 유년의 처마 끝에 다소곳이 앉는 말 엉겁결에 튀어나온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뇌리 속에 잊혀져가는 어머니의 손맛을 내 몸이 스스로 기억해 낸 말이다 나 오늘, 속살까지 뜨거워지고 싶다는 뜻이다 오늘은 그냥, 수제비 어때, 입맛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당신, 오늘 외롭다는 말이다 진짜 배고프다는 뜻이다. (그림 : 양준모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