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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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림 - 길에서 말을 묻다시(詩)/허림 2014. 10. 16. 18:00
바다를 보고 슬퍼하면 정말 슬퍼진다 모래톱 잔물결 지는 하얀 물보라가 슬퍼진다 포래 따라 금세 숨어버리는 소라게가 슬퍼진다 소라게가 보이지 않아 슬퍼지고 파도가 또 밀려와 게의 집을 묻어버려 슬퍼진다. 바다를 보고 저게 나와 같다고 하면 나도 바다를 닮는다 내가 걸어온 길이 파도자락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새처럼 길을 만들며 간다 파도가 밀어 올린 팍팍한 사막에 내 몸을 실어 깊은 발자국을 만든다 바다는 만들어진 게 아니어서 길이 남지 않는다 바다는 생장하는 땅이고 푸른 그늘이고 그리움이고 절망이고 파도는 입이고 숨소리이고 호흡이다 바다가 걸어간 자리마다 소금기가 배어 나왔다 바다가 왔다 간 길을 점봉산 기슭에 쌓여있는 조개무지에서 만났다 언제 떠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로부터 길은 갈래 갈래 자꾸만 갈라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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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림 - 조반 들었냐시(詩)/허림 2014. 10. 16. 17:54
아침 일찍 어머니는 부엌에서 밥을 지으십니다 광 항아리에서 쌀을 퍼오셔서 절미 항아리에 한 줌 덜어놓고 이남박에 쌀을 씻고 두 번째 뜨물을 받아 무국을 끓이고 무쇠솥에 쌀을 안칩니다 어머니 손은 마디마디 얼음이 들어 빨갛게 부어 있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그제야 어머니는 아궁이 앞에 앉아 언손을 녹이며 감자를 깎아 밥솥에 넣고 식은 화로를 뒤적거려 불씨를 골라 구멍쇠를 질러놓고 무국 냄비를 얹어 놓습니다 김치 곽에서 시금털털한 배추 한포기를 꺼내 썰어 놓고 밥이 뜸들 때를 기다려 솥이며 부뚜막을 닦습니다 무 냄새 밥냄새가 들창문을 넘을 때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걷어 탈탈 텁니다 갑자기 들어친 찬바람에 오돌오돌 떨며 수돗가로 나갑니다 그새 어머니는 방안을 훔쳐내고 드디어 아침밥상이 들어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