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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림 - 길에서 말을 묻다시(詩)/허림 2014. 10. 16. 18:00
바다를 보고 슬퍼하면 정말 슬퍼진다
모래톱 잔물결 지는 하얀 물보라가 슬퍼진다
포래 따라 금세 숨어버리는 소라게가 슬퍼진다
소라게가 보이지 않아 슬퍼지고 파도가 또 밀려와 게의 집을 묻어버려 슬퍼진다.
바다를 보고 저게 나와 같다고 하면 나도 바다를 닮는다
내가 걸어온 길이 파도자락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새처럼 길을 만들며 간다
파도가 밀어 올린 팍팍한 사막에 내 몸을 실어 깊은 발자국을 만든다
바다는 만들어진 게 아니어서 길이 남지 않는다
바다는 생장하는 땅이고 푸른 그늘이고 그리움이고 절망이고
파도는 입이고 숨소리이고 호흡이다
바다가 걸어간 자리마다 소금기가 배어 나왔다
바다가 왔다 간 길을 점봉산 기슭에 쌓여있는 조개무지에서 만났다
언제 떠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로부터 길은 갈래 갈래 자꾸만 갈라졌다
그 길의 가랭이에 나는 늘 서있고 갈등한다
그 많은 길이 다 내 길이 아니었듯이 모든 길이 물음표처럼 휘어졌다
(그림 : 박명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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