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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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림 - 울궈내다시(詩)/허림 2015. 5. 4. 14:52
골을 울궈낸다 울궈내는 일은 삶의 결박을 푸는 일이다 흐물흐물해지는 일이다 가마솥이든 양은냄비든 오래도록 과내는 일이다 불을 주데 꺼지지 않을 만큼 너무 세도 안 되고 사그라져도 안 된다 천천히, 스스로 몸 풀 때까지 몸을 풀어 다시 엉겨붙을 때까지 한 마리 짐승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다 마을회관에서 문자메시지 보내는 법을 배운 우리 어머이가 문자를 보내왔다 -지녁에 지배 오라오그라 씨래기 국 과 놯다 나는 우리 어머이를 오래오래 울궈먹고 싶다 (그림 : 림용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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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림 - 유월 대관령시(詩)/허림 2015. 5. 4. 14:46
바닷가 마을에 봄꽃이 다 지고 난 무렵 대관령에 갔다 이제야 노란 향기 품은 꽃들과 발가스름한 까마구 복사꽃이 폈다 밭두렁에서 봄을 캐는 아낙들이 나물처럼 환하다 오래 전에 대관령 어딘가 산다는 산막의 여자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봄이 다 지나갔다고 쓴 것 같은데 다 지나간 봄을 만나러 오지 않겠냐는 답장이 왔다 몇 번의 봄이 바닷가를 지나간 후 문득 보고 싶은 봄꽃을 보려고 대관령을 갔다가 어떤 꽃향기에 끌려 산막을 지나게 되었다 안개가 밀려오고 이내 바람이 불었고 어떤 꽃향기도 이내 흐릿해지고 서늘했다 긴 밭고랑 끝에서 그 여자 닮은 여자가 이쪽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내 안개에 묻히고 밋밋한 등강에서 한 떼의 소들이 울며 내려왔다 유월 대관령 지날 때마다 봄을 만나러 오라는 한 여자가 산다고 여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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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림 - 흙담길을 걷다시(詩)/허림 2015. 5. 4. 14:37
오래된 바람이분다 망우 지고 아버지 밭으로 나가시고 들밥 이고 어머니 논으로 나가신다 그림자와 땅뺏기 하다가 은숙이가 소꿉놀이하자고 조른다 흙담장 아래 햇살 받아 살림 차린다 나는 남자라서 아빠가 되고 너는 여자래서 엄마가 된다 무엇이 행복했는지 웃는다 웃다가 어른처럼 싸우고 싸우다가 어머니처럼 울고 흙담장 아래 쪼그리고 앉으면 오래된 바람은 따뜻하다 눈이 자주 내렸다 아침이면 길과 맞닿은 모든 길은 환히 열렸다 흙담장 너머 달 뜨고 백 번이 넘는 계절이 지나갔다 아버지는 취해서도 돌아오지 않고 어머니는 자주 흙담장 아래 다 풀린 실타래마냥 앉아 계신다 오래된 바람이 분다 (그림 : 한영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