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조용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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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구름의 서쪽시(詩)/조용미 2015. 2. 23. 21:39
당신은 내가 모르는 사이 죽음 근처에 다녀왔소 당신이 사라진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요 당신은 내게 항상 부재하는 실재였으므로 어쩌면 아무것도 달라질 것이 없을지도 모르오 하지만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닐 것이오 무엇이 사라질 때마다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말하지 않겠소 아름답고 비루하고 쓰라리고 신비한 이 삶을 나는 또다시 살아내야 하는 것이오 섬세한 언어처럼 가을이 내 앞에 다시 왔소 나는 어떤 새로운 형식으로 당신을 그리워하기로 했소 왜 새롭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것 또한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소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어여쁜, 내가 헤아리지 못하는 사랑이 있었을 것이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만의 사랑이 있었을 것이오 이제 이 서러움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 되었소 한때 우리는 서러움을 함께 나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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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양화소록(養花小錄)시(詩)/조용미 2014. 2. 13. 13:17
올봄 하릴없어 옥매 두 그루 심었습니다 꽃 필때 보자는 헛된 약속 같은 것이 없는 봄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군요 내 사는 곳 근처 개울가의 복사꽃 활짝 피어 봄빛 어지러운데 당신은 잘 지내나요 나를 내내 붙들고 있는 꽃 핀 복숭아나무는 흰 나비까지 불러 들입니다 당신은 잘 지냅니다 복사꽃이 지는데 당신은 잘 지냅니다 봄날이 가는데 당신은 잘 지냅니다 아슬아슬 잘 지냅니다 가는 봄 휘영하여 홍매 두 그루 또 심어 봅니다 나의 뜰에 매화 가득하겠습니다 (그림 : 이완호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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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가을밤시(詩)/조용미 2014. 2. 2. 09:57
마늘과 꿀을 유리병 속에 넣어 가두어두었다 두 해가 지나도록 깜박 잊었다 한 숟가락 뜨니 마늘도 꿀도 아니다 마늘이고 꿀이다 당신도 저렇게 오래 내 속에 갇혀 있었으니 형과 질이 변했겠다 마늘에 緣하고 꿀에 연하고 시간에 연하고 동그란 유리병에 둘러싸여 마늘꿀절임이 된 것처럼 내 속의 당신은 참당신이 아닐 것이다 변해버린 맛이 묘하다 또 한 숟가락 나의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줄 마늘꿀절임 같은 당신을, 가을밤은 맑고 깊어서 방 안에 연못 물 얇아지는 소리가 다 들어앉는다 (그림 : 장용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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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유적(流謫)시(詩)/조용미 2014. 2. 2. 09:51
오늘밤은 그믐달이 나무 아래 귀고리처럼 낮게 걸렸습니다 은사시나무 껍질을 만지며 당신을 생각했죠 아그배나무 껍질을 쓰다듬으면서도 당신을 그렸죠 기다림도 지치면 노여움이 될까요 저물녘, 지친 마음에 꽃 다 떨구어버린 저 나무는 제 마음 다스리지 못한 벌로 껍질 더 파래집니다 멍든 푸른 수피를 두르고 시름시름 앓고 있는 벽오동은 당신이 그 아래 지날 때 꽃 떨군 자리에 다시 제 넓은 잎사귀를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당신의 어깨를 만지며 떨어져내린 잎이 무얼 말하고 싶은지 당신이 지금 와서 안다고 한들 그리움도 지치면 서러움이 될까요 하늘이 우물 속 같이 어둡습니다 (그림 : 장용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