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조용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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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시(詩)/조용미 2014. 1. 17. 20:16
폭우가 쏟아지는 밖을 내다보고 있는 이 방을 능우헌(凌雨軒)이라 부르겠다 능우헌에서 바라보는 가까이 모여 내리는 비는 다 직립(直立)이다 휘어지지 않는 저 빗줄기들은 얼마나 고단한 길을 걸어 내려온 것이냐 손톱이 길게 쩍 갈라졌다 그 사이로 살이 허옇게 드러났다 누런 삼베옷을 입고 있었다 치마를 펼쳐 들고 물끄러미 그걸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입은 두꺼운 삼베로 된 긴 치마 위로 코피가 쏟아졌다 입술이 부풀어올랐다 피로는 죽음을 불러들이는 독약인 것을 꿈속에서조차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일까 속이 들여다보이는 창(窓)봉투처럼 명료한 삶이란 얇은 비닐봉지처럼 위태로운 것 명왕성처럼 고독한 것 직립의 짐승처럼 비가 오래도록 창밖에 서 있다 (그림 : 박항율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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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적막이라는 이름의 절시(詩)/조용미 2014. 1. 17. 20:12
적막이라는 이름의 절에 닿으려면 간조의 뻘에 폐선처럼 얹혀 있는 목선들과 살 속까지 내려꽂히며 몸을 쿡쿡 찌르는 법성포의 햇살을 뚫고 봄눈이 눈앞을 가로막으며 휘몰아치는 저수지 근처를 돌아야 한다 무엇보다 오랜 기다림과 설레임이 필요하다 적막이라는 이름의 나무도 있다 시월 지나 꽃이 피고 이듬해 시월에야 붉은 열매가 익는 참식나무의 북방 한계선, 내게 한 번도 꽃을 보여준 적 없는 잎이 뾰족한 이 나무는 적막의 힘으로 한 해 동안 열매를 만들어낸다 적막은 단청을 먹고 자랐다 뼈만 남은 대웅전 어칸의 꽃문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이내 적막이 몸 뚫고 숨 막으며 들어서는 것을 알 수 있다 적막은 참식나무보다 저수지보다 더 오래된 이곳의 주인이다 햇살은 적막에 불타오르며 소슬금강저만 화인처럼 까맣게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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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흙 속의 잠시(詩)/조용미 2014. 1. 17. 20:08
붉은 흙방에서 며칠 잠을 자려 한다 온돌 위에 흙을 바르고 다듬고 말리고 또 흙을 바르기를 여러 번, 그 위에 얇게 콩기름을 칠한 다음 다시 여러 날 마르기를 기다려서 완성했다는 흙방 그 방에서 오래 이루지 못한 동그란 잠을 자려 한다 종이 한 장 깔지 않은 흙바닥을 이토록 매끈하게 만든 사람은 어떤 연장보다 빛나는 손을 가졌을 것이다 나는 자꾸 흙바닥을 만져본다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종이 한 장의 두께도 허락할 수 없는 결곡함을 정신의 가파름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어서 거죽이 없는 것이 불편함은 아니냐고 물어보는 어리석은 짓을 하느라 몸을 오래 뒤척인다 부드러운 흙은 단단한 바닥이 되어 나를 기다린다 몸을 누이니 따스하고 붉은 흙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빈틈없이 몸을 받쳐준다 단단한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