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조용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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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탐매행(探梅行)시(詩)/조용미 2017. 3. 5. 23:58
올봄 늙은 매화나무 한 그루 만나러 나선 길이 멀었지 멀어서 참으로 까마득했지 허물어질 듯 네모난 연못가에 서 있던 매화나무, 산속 깊은 물소리에 해마다 매화 향을 얹어놓았겠지 바람이 차서 대숲 종일 소란스러운 이른 봄날엔 꽃잎을 멀리까지 살러 보냈겠지 멀리서, 매화가 처음 보는 객이 찾아왔다네 내 아는 매화나무 한 그루는 오래 묵어 검고 갈라진 살갗을 가졌네 꽃잎도 높은 가지 끝에만 잔설처럼 달려 있네 내 아는 매화나무는 그 아래 지나다 문득 바라볼 일 없는 산속 깊은 곳에 있다네 나는 한나절 앉아 매화나무 한 그루를 포섭했지 물소리 쪽으로 기울어진 듯 자란 늙은 매화나무는 천 리 길을 오게 하고 한나절도 모자라 하루, 이틀을 다시 올라와 앉아 있게 하지 해 기울도록 앉아 있어도 아무도 내다보지 않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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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겨울 하루 , 매화를 생각함시(詩)/조용미 2016. 11. 23. 10:18
이월, 매화에 기운이 오르면 그 봉오리 따다 뜨거운 찻물 부어 한 송이 우주를 찻잔 속에 피어나게 해 볼까 화리목 탁자 근처 매화향을 두르고 잠시 근심을 놓아 볼까 九九의 첫날인 십이월의 어느 날부터 나는 목이 길어지고, 옷은 두꺼워지고 발은 더욱 차가워질 테지만 九九消寒圖구구소한도의 매화에 하루하루 표시를 해 나가며 여든 하루 동안 봄이 오는 저 먼 길을 마중 나가는 은밀한 기쁨을 누려 보는 것이다 매화가 피는 삼월의 어느 봄날이 올 때까지 여든 하루는 한 생, 여든 하루는 단 한순간 매화가 피는 한 생이란 매화를 보지 못하고 기다리는 한 생 탐매행에 나선 이른 봄날 어느 하루는 평생을 다 바치는 하루 두근거리는 품을 수 없는 하루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 : 동지부터 9일마다 점차 추위가 누그러져 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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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비누방울시(詩)/조용미 2016. 10. 2. 11:33
비누방울을 날린다 크고 작은 것들, 아이는 비누방울을 날리기 위해 태어난 듯 온 정신이 거기에 다 팔려 있다. 담장을 넘어 옆집으로, 지붕 위로, 나뭇가지 위로 골목으로....... 날아가다 그것은 꺼진다. 아이 눈에 꺼지는 비누방울은 없다 허망을 바라보는 것은 오직 나의 눈 내가 보지 않았더라면 누가 알았을까 저 비누방울이 잠시 공중을 흔들어놓았다는 걸 저렇게 가벼울 수 있다면, 비누방울은 그 속에 무엇을 가득 담고 있다 그래서 저리 가벼운 것이다. (그림 : 김지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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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몽산포 일기시(詩)/조용미 2016. 5. 19. 16:21
몽산포의 소나무들은 육지 쪽으로 조금씩 몸이 기울어 있었습니다 그 휘어짐을 바닷바람이나 파도의 탓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어둑한 해송 숲 사이로 이글거리는 해는 어둠 쪽으로 나를 몰아세웁니다 몽산포에서 왜 당신을 떠올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꼭 몽산포를 지났을 것 같아, 바람은 내 몸 구석구석을 쓰다듬으며 지나갑니다 눈 멀고 귀 멀어 울컥 몽산포를 토해놓으면 당신이 있는 쪽으로 휘어지는 소나무들, 몽산포의 소나무들 한쪽으로 기울어가는 까닭을 더듬더듬 가슴께를 만져보며 물어봅니다 당신의 발길이 몽산포에 닿았을 것 같아 솔숲 사이로 지는 뜨거운 해를 바라보았을 것 같아, 해지는 몽산포를 볼까 두려워 서둘러 길 떠났습니다 몽산포 : 충청남도 태안군 남면 몽산리에 있는 포구이다. 몽산리(夢山里) 이름을 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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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봄날은 간다시(詩)/조용미 2016. 2. 15. 10:43
내가 보낸 삼월을 무엇이라 해야 하나 이월 매화에 춘설이 난분분했다고, 봄비가 또 그 매화 봉오리를 적셨다고 어느 날은 춘풍이 하도 매워 매화 잎을 여럿 떨어뜨렸다고 하여 매화 보러 길 떠났다 바람이 찬 하루는 허공을 쓸어 담듯 손을 뻗어 빈손을 움켜쥐어보며 종일 누워 있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저 한 순간과 다음 순간 사이의 빈틈에서 별똥별이 두 번이나 떨어졌다고 해야 하나 무슨 귀하고 애틋한 것이 지상에서 사라지는지 별똥별이 몸을 누이고 있었던 그 적막한 날의 객창(客窓)으로 한 번은 길게 또 한 번은 짧게 안으로 쏟아지듯 스러졌다고 말해야 할지 내가 알 수 없는 그 일이 여러 날 마음을 지그시 누르며 어릿어릿 사람을 아프게 했다고 할까 내가 보낸 삼월은 그리하여 그늘도, 꽃도, 적막함도, 가파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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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분홍을 기리다시(詩)/조용미 2016. 1. 7. 20:00
산그늘 한쪽이 맑고 그윽하여 들었더니 거기 키 큰 철쭉 한 그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엷은 분홍빛 다섯 장의 통꽃들 환하여 그 아래 잠시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지요 그들의 이마를 어루만지니 열꽃이 살며시 번졌습니다 이른 봄꽃들 지나간 봄 숲을 먼 등불처럼 어른어른 밝히고 있는 그 여린 분홍빛에 내 근심을 슬쩍 올려놓고 바라보아요 실타래처럼 쏟아져 나온 열 가닥 꽃술은 바람이 없는데도 긴 속눈썹을 가늘게 떨고 있어요 떨어진 분홍빛들은 가만히 그 자리에서 빛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아래 애기나리들이 연둣빛 솜 방석을 깔고, 내려온 분홍빛들을 받쳐주고 있습니다 나는 애기나리들의 낮은 데 있는 그 마음을 받쳐줄까 하여 오래 고개 숙였지요 내 앉은 나무 아래 분홍빛은 모여들어 봄은 또 이곳에 잠시 머뭇거립니다 가까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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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메밀꽃이 인다는 그 말시(詩)/조용미 2015. 11. 24. 21:35
바닷가 사람들이 오랜말로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어부들은 메밀꽃이라 부릅니다 흰 거품을 일으키는 물보라를 메밀꽃이 인다하는데 그 꽃은 피는게 아니라 이는 거예요 피는 꽃이 스러지는 꽃을 알수 있을까요 지는 꽃이 일어나는 꽃을 숨 쉴 수 있을까요 먼 파도에서 일어나는 물거품을 나도 이 순간부터 메밀꽃이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잠에서 일어나고 연기가 일어나는 먼지가 일어나고 두통이 일어나는 아지랭이가 일어나고 혁명이 일어나는 산불이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는 불꽃이 일어나고 모래바람이 일어나는 일어나고 일어나 스러지고 또 스러져 다시 일어나는 그 꽃을 당신은 벌써 알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마음이 일어난다는 말은 어떤가요 메밀꽃처럼 흰 거품을 일으키며 솟구쳤다 스러지고 또 스러지는 이 마음 참 오래되었지요 메밀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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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구름 저편에시(詩)/조용미 2015. 8. 8. 22:16
현산면 백포리, 여기까지 왔다 윤두서 고택 용마루에 기러기 한 마리 오래 앉아 있다 기러기는 움직이지 않는 기러기다 움직이지 않음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저 방식이 불편하다 망부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이곳 바다 내음이 인다 오갈피나무 검은 열매를 혓바닥에 물이 들도록 따 먹었다 모래가 살결보다 고운 송평에서, 꽃이 지나간 자리 같은 작은 새 발자국 따라 멀리 가본다 막다른 길에 바다가 서 있다 당두리 갈대숲이나 연구리의 살구나무 한 그루 노하리의 가지 부러진 노송이 새겨져 있는 내 몸은 티베트 사자의 서처럼 단번에 읽을 수는 없는 책과 같아서 다만 어란, 가학리, 금쇄동 하고 낮게 불러보는 지명들 다 끌어안고 다니며 길을 앓는다 나를 뚫고 지나가는 풍경들이 또 나를 앓고 있는 길 위, 몸에 미열이 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