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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미 - 비자림에서 길을 잃다
    시(詩)/조용미 2020. 9. 2. 14:10

     

    숲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윽하고 어두운 초록 터널이 미로처럼 엉겨 있는,
    고개를 두리번거릴 때마다
    나무들로 뒤덮인 하늘이 비안개를 내뿜으며 깊은 숨을 쉬는
    그 숲엔
    융단 같은 이끼를 온몸에 두르고 있는 오래된 비자나무들이 있다


    누구나 숲에 한번 발을 디디면 길을 잃거나
    그 둥그런 세계에 금방 속하게 되고야 만다
    그 안에서는 오래 화석처럼 서서 몇백년 동안
    푸른 열매를 떨구어내는 일이 아주 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비자향은 미혹에 가깝다
    축축한 땅 위에 가득 흩어져 있는 푸른 열매들은
    몸을 쩍쩍 가르며 어질머리 나는 향기를 내뿜는다
    그 혼미함을 떨쳐내기란 잘 다스려지지 않는 마음을
    오래 끌고 다니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어디 먼데 여행이라도 다녀온 듯한 나무들,
    누구도 저 비자나무들처럼 그렇게 멀리 떠날 수는 없다
    팔다리가 몸에 다 영겨붙도록
    한자리에 오래 서 있어야 한다는 것,
    숲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먼곳에서 돌아온 듯한 얼굴을 하고
    비자나무 사이를 천천히 걸어나온다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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