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용미 - 비자림에서 길을 잃다시(詩)/조용미 2020. 9. 2. 14:10
숲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윽하고 어두운 초록 터널이 미로처럼 엉겨 있는,
고개를 두리번거릴 때마다
나무들로 뒤덮인 하늘이 비안개를 내뿜으며 깊은 숨을 쉬는
그 숲엔
융단 같은 이끼를 온몸에 두르고 있는 오래된 비자나무들이 있다
누구나 숲에 한번 발을 디디면 길을 잃거나
그 둥그런 세계에 금방 속하게 되고야 만다
그 안에서는 오래 화석처럼 서서 몇백년 동안
푸른 열매를 떨구어내는 일이 아주 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비자향은 미혹에 가깝다
축축한 땅 위에 가득 흩어져 있는 푸른 열매들은
몸을 쩍쩍 가르며 어질머리 나는 향기를 내뿜는다
그 혼미함을 떨쳐내기란 잘 다스려지지 않는 마음을
오래 끌고 다니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어디 먼데 여행이라도 다녀온 듯한 나무들,
누구도 저 비자나무들처럼 그렇게 멀리 떠날 수는 없다
팔다리가 몸에 다 영겨붙도록
한자리에 오래 서 있어야 한다는 것,
숲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먼곳에서 돌아온 듯한 얼굴을 하고
비자나무 사이를 천천히 걸어나온다(그림 : 안기호 화백)
'시(詩) > 조용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용미 - 나무가 되어 (0) 2022.03.24 조용미 - 종점 (0) 2020.07.07 조용미 - 마음 (0) 2020.06.24 조용미 - 물에 비친 버드나무 가지의 그림자 (0) 2020.06.15 조용미 - 일요일 (0) 2020.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