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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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 법성포 1시(詩)/박남준 2015. 5. 22. 16:30
이제 한 세월 지나면 뻘밭으로 몰려남아 옛적 기억들만 퍼질나게 떠올릴 폐선장이 다 되어 온 법성포 앞바다 어릴 적 까마득히 솟은 걸대 이루 셀 수 없고 걸대들 마디마다 두름두름 말려놓은 가진 입이면 들어 아는 범성포 영광굴비 다랑가지 아재들이 칠산 조기 낚아다가 배떼기에 돋은 비늘 쓰억쓰억 긁어내고 아가리며 아가미에 염을 먹여 맛을 내다 빼갈보다 더 독하고 양주보다 더 좋은 놈 맥주 먹고 정종 먹던 입 한잔이면 나뒹굴을 토종이지 법성토종 말술로 털어넣고 밤을 새워 두름 엮어 걸대에 걸었네 그때 아재들 가슴 참 든든해 보였는데 이제 한 세월 가고 뻘밭으로 몰려남아 아재들 똑딱배는 바다가 목마르고 폐선장이 다 되어도 밥성포 뱃놈으로 남겠다는 아직 곧은 가슴은 넉넉해 보이는데 아재의 허허 웃음이 가난에 절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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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 동백시(詩)/박남준 2015. 2. 14. 10:29
동백의 숲까지 나는 간다 저 붉은 것, 피를 토하며 매달리는 간절한 고통 같은 것 어떤 격렬한 열망이 이 겨울 꽃을 피우게 하는지 내 욕망의 그늘에도 동백이 숨어 피고 지고 있겠지 지는 것들이 길 위에 누워 꽃길을 만드는구나 동백의 숲에서는 꽃의 무상함도 다만 일별해야 했으나 견딜 수 없는 몸의 무게로 무너져 내린 동백을 보는 일이란 곤두박질한 주검의 속살을 기웃거리는 일 같아서 두 눈은 동백 너머 푸른 바다 더듬이를 곤두세운다 옛날은 이렇게도 끈질기구나 동백을 보러 갔던 건 거기 내 안의 동백을 부리고자 했던 것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떨어지네 무수한 칼날을 들어 동백의 가지를 치고 또 친들 나를 아예 죽고 죽이지 않은들 저 동백 다시 피어나지 않겠는가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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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 겨울 편지를 쓰는 밤시(詩)/박남준 2014. 11. 23. 11:19
무서리가 눈처럼 하얗게 내리던 날들이 지나갔다. 툇마루에 떠다놓은 물이 꽁꽁 얼음이 되는 날들도 있었다. 그 겨울 밤 문밖에 나서면 쩡쩡 거리는 소리가 들릴듯한 푸른 별들 부끄러워서 고개를 묻던 날들이 있었다. 반문처럼 그 별들에게 보이지 않는 길의 나침판을 묻기도 했었다. 불쏘시게로 쓰던 잔 나무가지들이며 소나무 잎들이 다 떨어진지도 십여일에 가깝다. 나무청의 나무들은 사흘이나 버틸 수 있을까. 새벽부터 구들장이 한기를 느끼게 한다. 새우처럼 잔뜩 웅크린 채 이불을 둘러쓰고 미적거린다. 문밖이 훤하네 새들이 또 흉을 보고 있겠지. 결국은 일어난다. 금새 날이 꾸무럭 거린다. 심상치 않구나. 나무를 조금이라도 해야겠어. 갈퀴와 큰 자루를 찾아들고 앞산에 오른다. 노란 소나무 잎들이 어느새 저렇게 수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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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 기다렸으므로 막차를 타지 못한다시(詩)/박남준 2014. 6. 17. 22:03
남은 불빛이 꺼지고 가슴을 찍어 내리듯 구멍가게 셔터문이 내려지고 얼마나 흘렀을까 서성이며 발 구르던 사람들도 이젠 보이지 않고 막차는 오지 않는데 언제까지 나는 막차를 기다리는 것일까 춥다 술 취한 사내들의 유행가가 비틀거리다 빈 바람을 남기며 골목을 돌아 사라지고 막차는 오지 않을 것인데 아예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할 것처럼 발길 돌리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어쩌면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일 같은지 막차는 오지 않았던가 아니다 막차를 보낸 후에야 막차를 기다렸던 일만이 살아온 목숨 같아서 밤은 더욱 깊고 다시 막차가 오는 날에도 눈가에 습기 드리운 채 영영 두발 실을 수 없겠다. (그림 : 한희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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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그 여자의 반짝이는 옷 가게시(詩)/박남준 2014. 2. 9. 12:45
하동에서 구례 사이 어진 강물 휘도는 길 비바람 눈보라 치면 공치는 날이다 집도 없고 포장마차도 없는 간이 휴게실이 있지 고물 트럭을 개조해 만든 재첩 국수와 라면, 맥주와 소주와 음료수와 달걀과 커피 등등 전망 좋고 목 괜찮아 오가는 사람들 주머니가 표 나지 않고 기분 좋게 가벼워지는 동안 눈덩이 같던 빚도 갚고 그럭저럭 풀칠도 하는데 빌어먹을 그 아저씨의 그 여자는 암에 덜컥 발목을 잡혔다 소원이 있었댄다 꿈 말이지 웃지 말아요 정말이라고요 반짝이는 옷을 입고 밤무대에 서는 가수 항암 치료 후유증으로 깊이 모자를 눌러쓴 그 여자는 아저씨를 졸라 간이 휴게소 아래 얼기설기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선풍기도 난로도 아니 전등도 하나 없는 간판도 없는 두어 평 비닐하우스 무허가 옷 가게 어려서나 더 젊어서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