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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남준 - 겨울 편지를 쓰는 밤
    시(詩)/박남준 2014. 11. 23. 11:19

     

     

    무서리가 눈처럼 하얗게 내리던 날들이 지나갔다.

    툇마루에 떠다놓은 물이 꽁꽁 얼음이 되는 날들도 있었다.

    그 겨울 밤 문밖에 나서면

    쩡쩡 거리는 소리가 들릴듯한 푸른 별들 부끄러워서

    고개를 묻던 날들이 있었다.

    반문처럼 그 별들에게 보이지 않는 길의 나침판을 묻기도 했었다.

     

    불쏘시게로 쓰던 잔 나무가지들이며

    소나무 잎들이 다 떨어진지도 십여일에 가깝다.

    나무청의 나무들은 사흘이나 버틸 수 있을까.

    새벽부터 구들장이 한기를 느끼게 한다.

    새우처럼 잔뜩 웅크린 채 이불을 둘러쓰고 미적거린다.

    문밖이 훤하네 새들이 또 흉을 보고 있겠지.

    결국은 일어난다. 금새 날이 꾸무럭 거린다. 심상치 않구나.

    나무를 조금이라도 해야겠어.

    갈퀴와 큰 자루를 찾아들고 앞산에 오른다.

     

    노란 소나무 잎들이 어느새 저렇게 수북하게도 떨어져 내렸구나.

    슬슬 갈퀴질을 몇번 하는데 소나무 잎새들로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

    녹두알 만한 푸른 열매가 대여섯개나 보인다.

    어디서 왔을까. 열매를 손에 들고 살펴보니 송진 냄새가 물큰 거린다.

    무슨 나무의 열매일까. 어떤 새가 이 열매를 먹었겠지.

    그리고 여기와서 실례를 했겠지.

    새들의 튼튼한 뱃속에서도 살아남아 여기에 싹을 틔우려는 모양이구나.

    그 씨앗들 다시 제자리에 놓아둔다.

     

    나 여기 숲속에 살며 그간 나무 한그루 심지 않은 채 나뭇잎들을 긁어가거나

    새파랗게 살아있는 나무들을 베어오지 않았던가.

    내 한 몸 따뜻한 잠자리를 얻고자 그 나무들 깜깜한 아궁이 속에 들이밀고

    불을 때며 살아 왔는데 새들은 나무들에 깃들어 둥지를 짓고 벌레들을 잡아먹으며

    이제 또 그 씨앗들을 옮겨서 숲을 키우려 하는구나.

    갈퀴를 내려놓고 한동안 우두망찰로 앉아 있었다.

    해가 뉘엿거린다.

    너 뭐하니.

    저만큼에서 직박구리가 꾸짖음처럼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

    그래 나무하러 왔었지. 갈퀴나무 한짐을 해서 서둘러 내려온다.

     

    툇마루에 앉아 담배한대 불을 당긴다.

    뜰앞에 무성하던 지난 여름의 풀들이, 나무들의 낙엽들이 경배를 하듯 낮게 엎드린 채

    다시 돌아올 거름으로 돌아가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그 길을 갈 수 있겠지.

    돌아갈 수 있겠지.

    새들이 돌아간 겨울 저녁 숲에 적막처럼 어둠이 깃든다.

     

    편지를 써야겠다.

    세상의 모든 그리운 것들을 위하여 올 겨울 길고 긴 편지를 써야겠다.

    내가 나에게 써야겠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 어찌 세상의 그리운 것들에게 떳떳할 수 있겠는가.

    뉘우침의 편지를 그리움의 편지를 쓰는 이 겨울 밤,

    밤새 세상을 하얗게 눈은, 흰눈은 내릴 것이다.

    그 눈길위에 첫 발자욱을 새기며 걸어 편지를 전하러 갈 것이다.

    그 발자욱을 따라 그리운 것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며 달려 올 것이다.

    (그림 : 윤석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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