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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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 겨울 풍경시(詩)/박남준 2013. 12. 29. 12:43
겨울 햇볕 좋은 날 놀러 가고 사람들 찾아오고 겨우 해가 드는가 밀린 빨래를 한다, 금세 날이 꾸무럭거린다 내미는 해 노루꽁지만하다 소한대한 추위 지나갔다지만 빨랫줄에 널기가 무섭게 버쩍버썩 뼈를 곧추세운다 세상에 뼈 없는 것들이 어디 있으랴 얼었다 녹았다 겨울빨래는 말라간다 삶도 때로 그러하리 언젠가는 저 겨울빨래처럼 뼈를 세우기도 풀리어 날리며 언 몸의 세상을 감싸주는 따뜻한 품안이 되기도 하리라 처마 끝 양철지붕 골마다 고드름이 반짝인다 지난 늦가을 잘 여물고 그중 실하게 생긴 늙은 호박들 이집 저집 드리고 나머지 자투리들 슬슬 유통기한을 알린다 여기저기 짓물러간다 내 몸의 유통기한을 생각한다, 호박을 자른다 보글보글 호박죽 익어간다 늙은 사내 하나 산골에 앉아 호박죽을 끓인다 문 밖은 여전히 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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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 단속사지 정당매시(詩)/박남준 2013. 12. 14. 18:28
봄날이었네 두고 벼르던 산청 단속사지 정당매 찾는 길 백석의 정한 갈매나무를 그려보던 두 눈 가득 기다리던 설렘이 내게도 있었네 거기 매화 한 그루 한 세월 홀로 향기롭던 꽃그늘은 옛 시절의 풍경이었는가 두 탑만이 남아 있는 단속사지 텅 빈 그 꽃잎들 저 탑 위에도 꽃 사태는 일어 바람을 불러 모았으리 늙고 꺾인 수령 610년 잔설같은 뼈만 남은 정당매여 네 앞에 서서 옛날을 기억해주랴 이름을 불러주랴 무상한 것들 어찌 사람의 일뿐일까 산중에 홀로 누웠네 별이 뜨기도 했네 별이 지기도 했네 (그림 : 류은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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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 바람과 돌들이 노래 부를 때까지시(詩)/박남준 2013. 12. 14. 18:27
그대를 향해 걸어가기 위해 제주에 왔네 관덕정에서부터 걸었네 명월지나 애월바다 마라도며 다랑쉬오름 그대를 만나 서로의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고 함께 길을 가려 햇볕과 비바람의 날 걷고 걸었네 바람과 돌, 오름의 전설이 숨 쉬는 땅 내 눈 모자라 다 보고 또 못 보네 유년의 기억을 부르는 바람개비의 풍차가 가던 발길을 설레게 하며 멈추게도 했네 개발로 파헤쳐진 아름다운 곶자왈도 보았네 유채꽃 흔들리는 노란 꽃 그늘 아래 쓰러지던 할머니와 어머니와 어린 누이의 넋들이 손짓하기도 했네 붉은 철쭉꽃 아래 으깨어진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내 형제들의 비명이 들려오기도 했네 쓰러진 것들이 일어나 함께 걷는 나 여기 제주에 왔네 그대를 향해 걸어간다는 것 바로 내 안의 생명과 평화를 얻기 위한 일 내 안으로 걸어가네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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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과시(詩)/박남준 2013. 12. 14. 18:26
고추밭에 고춧대들이 다 쓰러졌다 홀로 비바람 견디기에 힘들었던가 아니라면 그 어떤 전율 같은 격한 분노에 몸을 온통 내던졌는가 내 기억의 뒤란에 쓰러져 누운 것들이 있지 오래 묵었으나 삭지 않아 눈에 밟히는 것들이 있지 작년 여름 쓰러져 죽은 미루나무 가지들 잘라 지주대로 삼는다 껴안는구나 상처가 상처를 돌보는구나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과 엮이며 세워져 한 몸으로 일어선다 그렇지 그렇지 푸른 바람이 잎새들을 어루만지는구나 (그림 : 김일해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