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남준
-
박남준 - 나도야 물들어간다시(詩)/박남준 2017. 10. 12. 00:48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대의 곤한 날개 여기 잠시 쉬어요 흔들렸으나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작은 풀잎이 속삭였다 어쩌면 고추잠자리는 그 한마디에 온통 몸이 붉게 달아올랐는지 모른다 사랑은 쉬지 않고 닮아가는 것 동그랗게 동그랗게 모나지 않는 것 안으로 안으로 깊어지는 것 그리하여 가득 채웠으나 고집하지 않고 저를 고요히 비워내는 것 아낌없는 것 당신을 향해 뜨거워진다는 것이다 작은 씨앗 하나가 자라 허공을 당겨 나아가듯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여간다는 것 맨 처음 씨앗의 그 간절한 첫 마음처럼 (그림 : 윤종대 화백)
-
박남준 - 아름다운 관계시(詩)/박남준 2016. 12. 7. 17:15
사람들은 모르지 처음엔 이끼들도 살 수 없었어 아무것도 키울 수 없는 불모의 바위였지 작은 풀씨들도 날아와 싹을 틔웠지만 이내 말라버리고 말았어 돌도 늙어야 품안이 너른 법 오랜 날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지 그래 아름다운 일이란 때로 늙어갈 수 있기 때문이야 흐르고 흘렀던가 바람에 솔씨 하나 날아와 안겼지 이끼들과 마른 풀들의 틈으로 그 작은 것이 뿌리를 내리더니 비가 오면 바위는 조금이라도 더 빗물을 받으려 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었지 사랑이었지 가득 찬 마음으로 일어나는 사랑 그리하여 소나무는 자라나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바람을 타고 굽이치는 강물소리 흐르게 하고 새들을 불러 모아 노랫소리 들려주고 뒤돌아본다 산다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삶의 어느 굽이에 나, 풀꽃 한 포기를 위해 몸의 한편 내어..
-
박남준 - 지리산에 가면 있다시(詩)/박남준 2016. 5. 15. 09:27
- 둘레길 순한 애벌레처럼 가는 길이 있다 땀 흘리던 그 길의 저기쯤 마을이 보이는 어귀에는 오래 묵은 당산나무 귀신들이 수천 천수 관음의 손을 흔들며 맞이해서 오싹 소름이 서늘한 길이 있다 두리번두리번 둘레둘레 한눈을 팔며 가야만 맛을 보여주는 길이 있다 더운 여름날 쫓기듯 잰걸음을 놓는 눈앞에는 대낮에도 백 년 여우가 홀딱홀딱 재주를 넘으며 간을 빼 먹는다는 소문이 무시무시한 길이 있다 서어나무 숲이, 팽나무 숲이, 소나무 숲이, 서걱서걱 시누대 숲이 새파랗게 날을 벼리고는 데끼 놈, 게 섰거라 싹뚝, 세상의 시름을 단칼에 베어내고 도란도란 낮은 산길이 들려주는 이야기 작은 산골 마을들이 풀어놓은 정겨운 사진첩 퐁퐁퐁 샘물에 목을 축이며 가는 길이 있다 막걸리 한두 잔의 인심이 낯선 걸음을 붙드는 길..
-
박남준 - 먼 길에서 띄운 배시(詩)/박남준 2015. 7. 22. 18:50
부는 바람처럼 길을 떠났습니다 갈 곳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가 닿을 수 없는 사랑 때문도 더욱 아닙니다 그 길의 길목에서 이런저런 만남의 인연들 맺었습니다 산 넘고 들을 지났습니다 보이지 않는 길 끝에서 발길 돌리며 눈시울 붉히던 낮밤이 있었습니다 그 길가에 하얀 눈 나리고 궂은비 뿌렸습니다 산다는 것이 때로 갈 곳 없이 떠도는 막막한 일이 되었습니다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오래도록 그 강가에 머물렀습니다 이 강도 바다로 이어지겠지요 강물로 흐를 수 없는지 그 강엔 자욱이 물안개 일었습니다 이제 닻을 풀겠어요 어디 둘 길 없는 마음으로 빈 배 하나 띄웠어요 숨이 다하는 날까지 가슴의 큰 병 떠날 리야 있겠어요 제 마음 실어 띄울 수 없었어요 민들레 꽃씨처럼 풀풀이 흩어져 띄워 보낼 마음 하나 남아 있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