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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 지리산에 가면 있다시(詩)/박남준 2016. 5. 15. 09:27
- 둘레길
순한 애벌레처럼 가는 길이 있다
땀 흘리던 그 길의 저기쯤 마을이 보이는 어귀에는
오래 묵은 당산나무 귀신들이 수천 천수
관음의 손을 흔들며 맞이해서
오싹 소름이 서늘한 길이 있다
두리번두리번 둘레둘레
한눈을 팔며 가야만 맛을 보여주는 길이 있다
더운 여름날 쫓기듯 잰걸음을 놓는 눈앞에는
대낮에도 백 년 여우가 홀딱홀딱 재주를 넘으며
간을 빼 먹는다는 소문이 무시무시한 길이 있다
서어나무 숲이, 팽나무 숲이, 소나무 숲이,
서걱서걱 시누대 숲이 새파랗게 날을 벼리고는
데끼 놈, 게 섰거라 싹뚝,
세상의 시름을 단칼에 베어내고
도란도란 낮은 산길이 들려주는 이야기
작은 산골 마을들이 풀어놓은 정겨운 사진첩
퐁퐁퐁 샘물에 목을 축이며 가는 길이 있다
막걸리 한두 잔의 인심이 낯선 걸음을 붙드는 길이 있다
높은 산을 돌아 개울을 따라 산과 들을 잇고
너와 나, 비로소 푸른 강물로 흐르고 흐르는
아직 눈매 선한 논과 밭, 사람의 마을을 건너는 길이 있다
(그림 : 최수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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