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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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놀란흙시(詩)/마경덕 2014. 2. 21. 11:13
뒤집힐 때 흙도 놀란다 쟁기 삽 괭이 호미 쇠스랑 포클레인… 누가 제일 먼저 괭잇날에 묻은 비명을 보았을까 낯빛이 창백한, 눈이 휘둥그런 겨냥한 곳은 흙의 정수리거나 잠든 미간이거나, 흙의 표정을 발견한 누군가의 첫 생각, 그때 국어사전에 놀란흙이라는 명사가 버젓이 올라갔다 흙의 살붙이, 지렁이 땅강아지 개미 두더지 그것들이 가랑이를 헤집어 집을 짓고 길을 내도 놀라지 않는다 나무뿌리, 바위뿌리에도 덤덤한 흙이 사람만 보면 왜 그리 놀라는지, 흙의 나라 태초에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을 닮은 흙의 심장은 사람을 잘 알고 있다 공사장 주변, 포클레인이 파헤친 땅 매장된 산업폐기물을 껴안고 까맣게 죽어있었다 싱싱하던 흙빛은 흑빛이었다 소심하고 겁 많은 아버지는 흙집으로 들어가 더는 놀라지 않고, 나는 아직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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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물의 표정시(詩)/마경덕 2014. 2. 21. 11:10
돌멩이를 던지는 순간 둥근 입 하나가 떠올랐다 파문으로 드러난 물의 입, 저 잔잔한 호수에 무엇이든 통째로 삼키는 거대한 식도(食道)가 있다 물밑에 숨은 캄캄한 물의 위장 가라앉은 것들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누적된 그것들을 감추고 평온한 호수 물가에서 몸부림치던 울음을 지우고 태연하다 계곡이며 개울을 핥으며 달리다가 폭포에서 찢어진 입술을 흔적 없이 봉합하고 물은 이곳에서 표정을 완성했다 물속에 감춰진 투명한 찰과상들, 알고 보면 물은 근육질이다 무조건 주변을 끌어안는 물의 체질 그 이중성으로 부들과 갈대가 번식하고 몇 사람의 목숨은 사라졌다 물의 얼굴이 햇살에 반짝인다 가끔 허우적거림으로 깊이를 일러주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잔잔한 물의 표정을 믿고 있다 (그림 : 최윤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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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저녁과 밤의 사이에서시(詩)/마경덕 2014. 2. 21. 11:08
해질 무렵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었다 햇살에 등을 데우던 나무들이 남은 온기를 속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다 언젠가 어둠 속에서 바라본 강 건너 불빛 서너 개 정도의 온기였다 어린 새들이 둥지에 드는 동안 맨발로 이곳까지 걸어온 저녁은 신발을 고르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걸린 저녁의 신발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헐렁한 신발을 신고 저녁이 허리를 펴는 순간, 일제히 팔을 벌리는 나무들, 참나무 품에 산비둘기가 안기고 떡갈나무 우듬지에 까치가 자리를 잡았다 잘 접힌 새들이 책갈피처럼 꽂히고 드디어 저녁이 완성되었다 해가 뚝 떨어지고 숲은 서둘러 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저녁과 밤이 이어지는 그 사이를 서성거리며 난생 처음 어둠의 몸을 만져보았다 자꾸 발을 거는 어둠에게 수화로 마음을 건네도 사람의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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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흙, 벽시(詩)/마경덕 2014. 2. 20. 16:03
산자락 토담집 한 채. 벽이 기울었다. 흙 한줌 덥석, 발등에 떨어진다. 뭉텅 살점이 나간 흙벽, 벽의 갈빗대가 드러났다. 벽 속에 갈대가 묻혀있다. 군데군데 바람을 메운 자국들. 덧씌운 투박한 손자국에 수심이 가득하다. 누군가 흙손으로 벽의 주름을 펴고 흙 한 덩이 떼어 척, 구멍을 메울 때 불도장처럼 마음이 찍혔으리. 저 벽 속에 살던 두꺼비손을 가진 사내, 갈대 한 짐 마당에 부려놓고 벽의 뼈대를 촘촘히 엮었으리. 황토를 져 나르고 실팍한 장딴지로 흙을 치대면 욕심 없는 맨발에 흙은 반죽처럼 순해져서 벽이 되었을 것. 벽 속으로 들어간 사내는 집의 중심이 되었을 것. 중심을 잃은 벽, 입술을 달싹이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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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우물시(詩)/마경덕 2014. 2. 10. 17:20
눈물이 다만, 슬프다는 이유만으로 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마른 몸에서 물이 솟는 건 내 몸 어딘가에 우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 깊은 곳에 영혼이 물처럼 고여 있는 것이다. 흐르는 눈물은 내 영혼의 하얀 이마이거나 지친 발가락이거나 슬픔에 퉁퉁 불은 손가락이다. 영혼은 고드름이나 동굴의 석순처럼 거꾸로 자란다. 이것들은 모두 하향성이다. 근원을 향해 생각이 기울어 있다. 내가 나에게 찔리는 것, 슬픔이 파문처럼 번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석순처럼 자란 영혼을 손수건으로 받으면 발간 핏물이 든다. 나는 피 젖은 손수건 석 장을 가지고 있다. 그 오래된 손수건을 차곡차곡 접어 냉동실에 두었다. 꽁꽁 얼어붙은 냉동고의 영혼들은 더 많은 우물을 만들고 영혼을 생산한다. 고드름처럼 자라 맹물처럼 날아가 버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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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꽃과 밥시(詩)/마경덕 2014. 1. 20. 11:27
뿌리 잘린 꽃들이 행복하다 대부분 꽃의 생각은 긍정적이다 양동이에 담긴 노랑은 철없는 색(色), 애송이 꽃집처녀도 봄바람처럼 가볍다 몸값을 깎는다고, 꽃들이 입을 놀리기 전 먼저 지갑을 연다 제철이 아닌 장미에게 나는 호의적이다 하루치 식단과 한 다발의 꽃 반찬과 꽃을 달아보는 저울의 눈금은 늘 한쪽을 편애한다 꽃이, 샴푸가 되고 양말이 되고 비누와 우유가 되고 커피 한잔이 설렁탕으로 바뀌었을 때, 이미 꽃의 나이를 지나 밥의 나이로 기울고 있었다 한껏 과장된 꽃들, 포장을 한 감성은 금세 시든다 안개꽃이 추임새를 넣고 프리지어가 샛노란 향기를 생산해도 결국, 꽃은 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꽃들은 모른다 향기가 마른 식탁 모처럼 메뉴는 꽃밥이다 장미의 입술을 하찮게 여긴 내 나이에게 먹이려고 자반고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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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봄날시(詩)/마경덕 2014. 1. 12. 11:20
하동 고하리 장날, 줄줄이 이고 지고 버스에 오릅니다. 때는 봄, 온 천지가 후끈 달아올라 노인의 마른 몸에도 물이 고일 것 같은 날, 장 보고 가는 고무다라 보따리 포대자루 초만원입니다. 매부리코 노총각 윗말 어린 처녀 등에 찰싹 붙어 코를 씰룩, 눈을 내리 뜬 처녀 귓불이 붉네요. 훌쩍 마흔 넘긴 무지렁이 총각 절구통에 치마만 둘러놔도 거시길 디밀 겁니다. 환장할 봄이거든요. 재첩장사 과부 아지매, 떨이를 못했는지 어깨가 많이 기울었습니다. 최씨네 구멍가게 돌아 커브 길에 닿자 걸쭉한 아낙의 목소리, “에구구! 젓통 터진다.” 소갈머리 없는 밴댕이 남편에게 먹여보라는 젓갈장사에게 홀려 콤콤한 젓갈 한 봉지 산 게 그만 터지고 말았습니다. “젖통이요, 젓통이요?” 능글맞은 남정네의 물음에 왈칵 웃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