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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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시골집 마루시(詩)/마경덕 2014. 10. 30. 19:55
마루는 나이를 많이 잡수신 모양입니다 뭉툭 귀가 닳은 허름한 마루 이 집의 내력을 알고 있을 겁니다 봄볕이 따신 궁둥이를 디밀면 늘어진 젖가슴을 내놓고, 마루귀에서 이를 잡던 쪼그랑 할멈을 기억할 겁니다 입이 댓발이나 나온 며느리가 아침저녁 런닝구 쪼가리로 박박 마루를 닦던 그 마음도 읽었을 겁니다 볕을 따라 꼬들꼬들 물고추가 마르던 쪽마루 달포에 한 번, 건미역과 멸치를 이고 와 하룻밤 묵던 입담 좋은 돌산댁이 떠나면 고 여편네, 과부 십 년에 이만 서 말이여 궁시렁궁시렁 마루에 앉아 참빗으로 머릴 훑던 호랑이 시어매도 떠오를 겁니다 어쩌면 노망난 할망구처럼 나이를 자신 마루는 오래전, 까막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눈물 많고 간지럼을 잘 타던 꽃각시 곰살맞은 우리 영자고모를 잊었을지 모르지만, 걸터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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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술국시(詩)/마경덕 2014. 10. 22. 16:44
화병(火病) 난 할머니 일찌감치 선산으로 도망쳤다. 할머니를 놓친 할아버지 낮술 자시고 개골창에 처박혀 얼굴 딱지 굳기도 전 다리에서 실족했다. 절뚝절뚝 주전자 들고 술도가에 가는 할아버지. 이놈의 영감탱이! 죽은 할머니가 벌떡 일어났다. 벌초 간 할아버지 상석을 베고 누워 한 되짜리 소주병 입에 물고 주절주절 끝도 없는 노래를 흘렸다. 지겨운 영감탱이! 무덤 속 할머니 맨발로 옆 무덤으로 피신했다. 밤새 할머니를 앉혀두고 뭉친 속을 푸는 할아버지. 참다못한 할머니가 술상을 뒤엎고 뒷산으로 달아나면 찬 마룻바닥에 쓰러져 코를 고는 할아버지, 에구, 저 화상. 죽은 할머니가 담요 한 장을 끼고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에미야, 술국 좀 끓여라. 황태 한 마리 잡아 무 넣고 시원하게 끓여라. 큰어머니 퍽퍽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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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염천(炎天)시(詩)/마경덕 2014. 10. 22. 16:22
산기슭 콩밭에 매미울음 떨어진다 울음을 받아먹은 밭고랑 열무 바짝 약이 올랐다 상수리 그늘에 앉아 쓰르 쓰르 속 쓰려, 쓰려 혼자서는 속 쓰려 못산다고 짝을 찾는 쓰르라미 울음이 대낮 콩밭보다 뜨겁다 이놈아 그만 울어! 불볕에 속곳까지 흠뻑 젖은 할망구 등 긁어줄 영감 지심 맬 딸년도 없어 더 속이 쓰리다 호미 날에 바랭이 쇠비름 명아주 떨려 나가고 청상으로 키운 아들이 죽고 콩밭짓거리로 김치 담궈 올린 외며느리에게서 떨려 나온 할멈도 쓰름쓰름 다리 뻗고 울고 싶은데 그동안 쏟아버린 눈물이 얼마인지, 평생 울지 못하는 암매미처럼 입 붙이고 살아온 세월 슬픔도 늙어 당최 마음도 젖지 않고 콩 여물듯 땡글땡글 할멈도 여물어서 이젠 염천 땡볕도 겁나지 않는다 팔자 센 할멈이나 돌밭에 던져지는 잡초나 독하긴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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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죽방멸치시(詩)/마경덕 2014. 10. 22. 16:02
맑고 검은 눈, 은빛 바닷물에 몇 번이나 헹궜나 콕콕 박힌, 점점점점… 바다의 속살까지 읽어낸 또랑또랑한 눈동자가 물속에 점(點)을 찍고 몰려다닐 때 바다 한 권이 두툼해졌다 알을 품고 남해로 찾아온 멸치 떼 누군가 바다의 페이지를 부욱 찢어 지족항의 봄도 배로 늘었다 시린 해풍과 어부의 땀방울이 어우러져 마침맞게 간이 든 바다 난류를 타고 온 몇 두루마리의 긴 문장이 빠른 물살을 타고 대나무 통발로 흘러들었다 채반에 누워 젖은 생을 말리는 빽빽한 바다체들, 뭍으로 올라 멸막에서 다시 태어났다 뜰채로 건져 올려 비늘 하나 다치지 않았다 멸막 : 멸치를 삶아 말리는 곳 (그림 : 신종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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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말뚝시(詩)/마경덕 2014. 4. 19. 13:06
선착장 짠물에 얼룩진 쇠말뚝, 굵은 밧줄이 똬리를 틀고 말뚝의 목을 조이고 있다. 얼마나 많은 바다가 드나들었나. 끙차, 목에 밧줄을 휘감고 버틴 시간이 얼마인가. 투두둑 바다의 힘줄을 끓어먹은 말뚝모가지가 수평선을 향해 늘어져 있다. 녹이 슨 밑동. 벌겋게 흘린 눈물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든 밧줄, 단숨에 바다를 둘러매던 그을린 팔뚝, 노을에 젖은 만선의 깃발, 말뚝에 마음을 묶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철썩, 포구가 몸을 뒤트는 순간 말뚝이 영혼이 새어나간다. 수많은 이별을 치르는 동안 말뚝의 심장은 차갑게 식었다. 선창가 말뚝에 걸터앉아 떠난 사람을 생각한다. 말뚝 뽑힌 자리, 깊이 파였다 . 나를 맬 곳이 없다 (그림 : 손돈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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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솟대시(詩)/마경덕 2014. 2. 21. 11:38
어쩌다 드넓은 허공의 배경이 되었을까 공중은 그를 거부하고 그는 정물이 되었다 머리위로 흘러가는 구름은 인질로 잡힌 적이 없다 입체적인 하늘은 구름과 새 떼를 날려 여백을 채우고 노을을 풀어 허공을 채색한다 지루한 허공은 여러 장의 배경이 필요하다 볼모야, 볼모야 지나가던 바람이 그를 놀린다 붙박이 나무새, 평생 하늘로 머리를 둔 나무의 유언이 저곳에 매달렸다 나무의 친족인 목수(木手)는 새를 빚어 하늘 가까운 곳으로 죽은 나무를 올려 보냈다 생전의 기억으로 잠시 나무 끝이 축축하다 바람이 달려와 울음을 지우고 벙어리새는 다시 정물로 돌아간다 (그림 : 권옥연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