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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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조개는 입이 무겁네시(詩)/마경덕 2015. 11. 15. 10:27
조개는 나이를 등에 붙이고 다니네. 등딱지에 너울너울 물이랑이 앉아 한 겹, 두 겹, 주름이 되었네. 끊임없는 파도가 조개를 키웠네. 저 조개, 무릎이 닳도록 뻘밭을 기었네. 어딜 가나 진창이네. 평생 몸 안에 갇혀 짜디짠 눈물을 삼켰네. 조개는 함부로 입을 열지 않네. 조개장수 아줌마. 쪼그려 앉아 조개를 까네. 날카로운 칼날이 앙다문 입을 여는 순간 찍, 조개가 마지막 눈물을 쏟네. “지랄한다, 이놈아가 오줌빨도 쎄네.” 조개 까는 아줌마 쓱, 손등으로 얼굴을 닦네. 조개껍데기 수북하네. (그림 : 김의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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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시간의 방목장시(詩)/마경덕 2015. 11. 12. 11:36
3시, 7시, 2시 15분… 누가 이곳에 시간을 방목했을까 시간의 바깥이 고요하다 자유로운 저 세상 밖의 시간들 왜 늦었느냐고 닦달하는 사람도 없다 각기 보폭이 다른 침묵들, 낮과 밤이 뒤섞인 시침과 분침을 껴입은 무질서가 평화롭다 일생 이렇게 편한 때가 있었나 어제와 내일도 까맣게 잊고 종일 잠만 자도 좋은 시절은 세상을 알기도 전에 끝이 났다 횡단보도 앞 속도들이 다리를 뻗고 누웠다 고장 난 신호등에 길이 막혀도 태연한 대명시계점 저 묵언默言을 깨워 값을 지불하는 순간 끝없는 동그라미에 갇혀 죽을 때까지 고된 노역勞役을 치러야한다 소리에 귀가 늙은 사내가 시계를 팔뚝에 묶는 순간, 시간의 노예가 태어났다 세 개의 바늘이 놓친 걸음 허겁지겁 따라간다 (그림 : 이석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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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토마토의 생존법시(詩)/마경덕 2015. 6. 30. 11:48
어느 날 바람에 묻어온 씨앗 하나 사거리 신발가게 귀퉁이 능청스레 물고 서있더니 차양아래 고인 그늘을 떠먹고 훌쩍 자랐다 볕에 주린 가녀린 줄기들 어쩌다 들이친 빗방울에 목을 축이고 방울방울 풋것을 매달았다 오가는 발길에 차일까 노심초사 모서리 틈에 달라붙어 아직 무탈하다 드나드는 손님의 눈길조차 두려웠을 저 여린 가지들 낯선 땅 곁방살이로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 슬쩍 쓰다듬으니 놀란 잎이 질펀하게 경고를 쏟아낸다 손에 묻은 안색(顔色)이 시퍼렇다 철을 놓친 저 풋것 한줌의 농사를 업어 키우려고 그렇게 토마토는 등이 휘었던 것 시장통에 나온 등 굽은 오무래미 할미들도 저렇게 애를 업어 키웠다 시장 신발가게 모서리 철모르는 토마토 한 그루 혀가 아린 새끼들 꼭 붙잡고 섰다 오무래미 : 이가 다 빠진 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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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무꽃시(詩)/마경덕 2015. 5. 2. 22:00
비닐봉지를 열어보니, 후다닥 무언가 뛰쳐나간다. 가슴을 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꽃이다. 까만 봉지 속이 환하다. 비닐봉지에 담긴 묵은 무 한 개 꽃자루를 달고 있다. 베란다 구석에서 뒹굴던 새득새득한 무. 구부정 처진 꽃대에 보랏빛 꽃잎이 달렸다. 독하다 참말 독하다. 물 한 모금 없이 꽃을 피우다니. 손에 얹힌 무, 몸집보다 가볍다 척, 제 무게를 놔버리지 못하고 주저주저 망설인다. 봄이 말라붙은 무꼬랑지 쥐고 흔들어댄 모양이다. 창을 넘어와 봉다리를 풀고 무를 부추긴 모양이다 눈을 뜨다 만 연보라빛 무꽃. 여기가 어디라고 덜컥, 꽃이 되었던가. 어미 살을 파먹고 꽃이 된 무꽃. 쪼그라진 젖을 물고 있는 무꽃. (그림 : 노숙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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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섬은 언제나 내게로 온다시(詩)/마경덕 2015. 2. 22. 13:39
멀리서 바라보는 동안 정수리에서 동백이 터지고 서둘러 핀, 봄은 끝내 자진했다. 자욱한 안개에 섬이 사라지면 울음을 물고 물새들이 이곳까지 날아왔다. 오랫동안 부리에 쪼인 울음을 읽지 못했다. 겹겹 파도를 덮고 잠이 든 목덜미와 젖은 발가락이 무엇을 붙잡고 버티는지, 묻지 않았다. 묶인 배들이 바람을 풀고 떠났지만 나는 여전히 거리를 서성거렸다. 그 사이 해협을 건너온 바람이 도시를 강타했다. 늙은 사내는 회사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낯익은 이름들이 어디론가 떠밀려갔다. 몸을 낮추고 바람을 버티는 동안, 방파제에서 밤새 징이 울었다. 바람보다 사람이 두려웠다. 섬은 얼마나 무거운 닻을 가졌을까? 그때 처음으로 무게에 대해 내게 물었다. 아득한 뱃길, 번번이 섬을 스쳐갔을 뿐, 끝내 뱃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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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빈 방시(詩)/마경덕 2015. 2. 10. 11:07
우묵한 집,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누가 살다 갔나. 오래된 적막이 나선형으로 꼬여 있다. 한 줌의 고요, 한 줌의 마른 파도가 주홍빛 벽에 걸려 있다. 조심조심 바다 밑을 더듬으면 불쑥 목을 조이는 문어의 흡반, 허둥지둥 불가사리에 쫓겨 참았던 숨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뽀글뽀글 물갈피에 쓴 일기장을 넘기면… 빗장을 지른, 파도 한 방울 스미지 않는 방. 철썩 문 두드리는 소리에 허리 접힌 불안한 잠이 있고. 파도가 키운 둥근 나이테가 있고 부우― 부우― 저음으로 가라앉은 호른소리, 떨리는 어깨와 부르튼 입술도 있다. 모자반숲 파래숲 울창한 미역숲이 넘실대고 프렌치호른에 부르르 바다가 젖고 밤바다의 비늘이 반짝이고 외로운 나팔수가 살던 방, 문짝마저 떨어져 나간 소라껍데기, 잠시 세들었던 집게마저 떠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