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홍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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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섭 - 자작나무숲을 지나온 바람시(詩)/이홍섭 2017. 5. 7. 14:31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창을 열고 대관령을 보네 친구들은 대관령을 넘는 게 꿈이라고 했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영 너머를 넘어가는 꿈 같은 건 꾸지 않았네 하긴 이상하지, 왜 나는 일찍부터 한곳에 머물길 원했었는지 왜 일찍부터 저 너머, 미지의 세계를 꿈꾸지 않았었는지 하지만 후회 같은 건 없네 내가 가장 먼저 창을 열고 대관령을 바라보는 것은 순전히 흰 자작나무숲 때문이지 대관령을 넘어온 찬 바람이 이마를 스치는 순간, 나는 대관령 정상에서 무리 지어 자라는 흰 자작나무 떼를 상상하게 되네 자작나무 떼를 지나온 하얗고 투명하고, 수정처럼 차디찬 바람 말일세 고향에 돌아온 것은 순전히 이 바람을 맞고 싶어서이지 여름 가고, 가울 가고 흰 눈 내리는 겨울이 와도 영 너무 도시에서는 이 바람을 맞을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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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섭 - 아야진시(詩)/이홍섭 2016. 10. 25. 22:11
멀리 와서 바다를 본다 아팠구나 저리도 많은 손 갈퀴가 몰려와 모래를 긁어대는 것은 아직도 못 다한 얘기가 남아 있기 때문 얘기를 안 하면 귀신도 모른다 했는데 귀신의 입과 귀도 막아버리고 검은 파도가 친다 내려놓자 내 것이 아니어서 슬펐던 것들 산도, 별도 골짜기를 떠돌던 반딧불도 반딧불 같았던 여인도 내려놓는다 미안하다 멀리 와서 비로소 바다에 닿았구나 아야진 :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아야진해변길 속초에서 북으로 6km, 국도 7번에서 약 500m 들어가는 이곳은 주위경관이 수려해 해마다 찾는 피서객이 증가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바위와 맑은 바다, 깨끗한 백사장이 어울려 가족단위 피서지로 적합한 곳이다. 백사장 길이 600m, 폭 50m에 수심은 해변에서 30m까지는 1.5~2m이다. (그림 :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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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섭 - 절시(詩)/이홍섭 2015. 9. 30. 19:18
일평생 농사만 지으시다 돌아가신 작은할아버지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절을 잘하셨다 제삿날이 다가오면 나는 무엇보다 작은할아버지께서 절하시는 모습이 기다려지곤 했는데 그 작은 몸을 다소곳하게 오그리고 온몸에 빈틈없이 정성을 다하는 자세란 천하의 귀신들도 감동하지 않고는 못 배길 모습이라 세상사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가만히 그 모습을 떠올리며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끝을 모아보지만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모자라도 한참은 모자란 자세라 제풀에 꺾여 부끄러워하기도 하지만 먼 훗날 내 자식이 또한 영글어 제삿날 내 절하는 모습을 뒤에서 훔쳐볼 때 그 모습 그대로 그리워지길 그리워져서 천하의 귀신들도 감동하지 않고는 못 배길 모습이라 생각해주길 내처 기대하며 나는 또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가만히 발끝을 모아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