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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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 사북이 어디예요?시(詩)/이건청 2016. 12. 26. 13:15
사북 가는 길 아세요? 산수유 꽃 노오랗게 핀 함백산, 아직도 흰눈이 희끗이는 정상을 끌어안은 채 그냥 봄 속으로 옮겨 앉은 산자락, 사북을 아세요? 아직 탄 더미는 클레인 카에 실려 역두(驛頭)에 쌓이고 빈칸의 적재함을 기일게 매단 디젤차는 사북에 멈추는지요? 아직 연탄불 파아랗게 타고 석쇠 위 큼직한 비계는 오그라들며 연기를 피워 올리는지 어떤지, 얼굴이 달아오른 사내들이 소줏잔을 들어 올리며 부딪치던 쨍그렁 소리는 여전하며, 어용 노조 위원장은 아직 거기 사는지, 거기 가서 활 활 타는 술판에 앉고 싶다. 사북 가는 길 아세요? (그림 : 박진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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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 산양시(詩)/이건청 2015. 6. 17. 12:19
아버지의 등뒤에 벼랑이 보인다. 아니, 아버지는 안 보이고 벼랑 만 보인다. 요즘엔 선연히 보인다. 옛날, 나는 아버지가 산인 줄 알았다. 차령산맥이거나 낭림산맥인 줄 알았다. 장대한 능선들 모두가 아버지인 줄만 알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었다. 푸른 이끼를 스쳐간 이 큰 산의 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는 것이라고, 수평선에 해가 뜨고 하늘도 열리는 것이라고. 그때 나는 뒷짐지고, 아버지 뒤를 따라갔었다. 아버지가 아들인 내가 밟아야 할 비탈들을 앞장서 가시면서 당신 몸으로 끌어안아 들이고 있는 걸 몰랐다. 아들의 비탈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까마득한 벼랑으로 쫓기고 계신 걸 나는 몰랐었다. 나 이제 늙은 짐승 되어 힘겨운 벼랑에 서서 뒤돌아보니 뒷짐 지고 내 뒤를 따르는 낯익은 얼굴 하나 보인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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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 곰소항에서시(詩)/이건청 2014. 10. 3. 15:52
곰소 염전 곁 객사에 누워 하루를 잔다. 짠 바닷물은 마르고, 다시 마르며 결장지까지 와서 소금으로 가라앉는데, 이 마을 드럼통들 속에서는 새우와 바닷게들도 소금을 끌어안은 채 쓰린 꿈속에서 제 살을 삭혀 젓갈로 곰삭고 있을 것인데, 변산 바다 밀물의 때, 바다는 밀고 밀며 다시 곰소항으로 돌아오면서 흰 포말로 낯선 새들을 부르고, 산비탈 호랑가시나무 숲을 부르며, 젓갈 가게에 쌓인 드럼통들을 찾아와 드럼통 속 새우와 참게들에게 풍랑의 바다 소식을 전하면서 곰삭은 황혼도 조금씩, 밀어 넣어 주고 있구나, 아주 잊지는 않았다고 젓갈로 익더라도 서로 잊지는 말자고 밤새 속삭여주고 있구나 곰소 염전 곁 객사의 사람도 내소사 전나무 숲 위에 뜬 초롱초롱한 별도 몇 개 꿈속에 따 넣으며 쓰린 잠을 자는데, 소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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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 식구(食口)시(詩)/이건청 2014. 9. 11. 16:00
감자를 먹었다. 심지를 낮춘 등잔불 아래 저녁 식탁에 모여 앉아 감자를 먹었다. 아버지는 오시지 않고, 이른 봄 황사 바람만 담벼락에 묶인 시래기를 흔들고 가는데, 심지를 낮춘 등잔불 아래서 구운 감자를 먹었다. 동치미 사발에 파란 파가 떠 있었다. 아버지는 오시지 않고, 날은 어둔데, 하늘엔 철새들이 가는지, 스척스척 날갯짓 소리가 등잔불 심지를 흔들고, 흔들리는 불빛 속에서 감자를 먹었다. 아버지가 오시지 않는 저녁, 식구들끼리 둘러앉아 감자를 먹었다. 이제, 감자 굽던 어머니도 감자 먹던 형도 안 보이는데, 이따금, 저물녘 지붕 위의 철새 소리를 듣고 싶은 때가 있다. 심지를 낮춘 등잔불 다시 켜고 감자를 먹고 싶은 때가 있다. (그림 : 이원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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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 멸치시(詩)/이건청 2014. 1. 10. 10:16
내가 멸치였을 때 바다 속 다시마 숲을 스쳐 다니며 멸치 떼로 사는 것이 좋았다 멸치 옆에 멸치, 그 옆에 또 멸치 세상은 멸치로 이룬 우주였다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며 붉은 산호, 치밀한 뿌리 속을 스미는 바다 속 노을을 보는 게 좋았었다 내가 멸치였을 땐 은빛 비늘이 시리게 빛났었다 파르르 꼬리를 치며 날쌔게 달리곤 하였다 싱싱한 날들의 어느 한 끝에서 별이 되리라 믿었다 핏빛 동백꽃이 되리라 믿었었다 멸치가 그물에 걸려 뭍으로 올려지고 끓는 물에 담겼다가 채반에 건저져 건조장에 놓이고 어느 날, 멸치는 말라 비틀어진 건어물로 쌓였다 그리고, 멸치는 실존의 식탁에서머리가 뜯긴 채 고추장에 찍히거나 끓는 냄비 속에서 우려내진 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내가 멸치였을 때 별이 되리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