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서지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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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월 - 밥그릇시(詩)/서지월 2014. 10. 1. 00:57
바람이 부는 것은 몇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꼭 같다. 단군할아버짓적 박달나무 가지끝에서부터 불던 바람이 하사(下賜) 받듯 차례로 징검다리를 건네온 것이 목하(目下), 수 천년 귓구멍 뚫린 콧구멍 뚫린 살풀이 한다. 바람 부는 날, 청솔방울 몸 데울 때는 다락에 올라서 피리를 불자. 밥그릇이 넘치도록 피리를 불자. 밥상 위의 밥그릇, 밥상 밑에 밥그릇, 부뚜막 위에 밥그릇, 부뚜막 밑에 밥그릇, 장독간에 밥그릇, 마당가의 개밥그릇...... 어디를 가나 밥그릇은 하나씩 놓여 있다. 하나씩 놓여 있는 밥그릇에 육정(六情)의 당국화(唐菊花)는 피고 한 그릇 한 그릇씩 떠받들어 온 향(香)불, 숙원이여. 내 물려받은 하나의 밥그릇에도 조석(朝夕)으로 김이 서리고 그 당국화(唐菊花)같은 향(香)불같은 풀리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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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월 - 푸른 하늘의 뜻은시(詩)/서지월 2014. 10. 1. 00:53
내 마음의 시렁 위에 바람은 와서 머무나 검은 솥뚜껑 같은 구름 걷힌 밤나무 사이로 빤히 올려다보이는 하늘일 때 어머니는 젊은 날 목화(木花)밭을 오르시고 나는 그 밭둑에 홀로 핀 엉겅퀴꽃 해지도록 바라보고 있었네. 잡초 우거진 산길에는 땅을 오르는 꽃상여 상여꾼의 노래소리가 발밑에서 들려오고 장승처럼 머언 들녘에 봉긋 솟은 돌무덤 가으론 잦아드는 흑가마귀떼 울음소리, 등 굽은 새우마냥 낮에 나온 저 반달은 할머니적 마당가에 꽃씨 심던 호미 같고 우우 맑은 하늘에 바람 지나가는 것은 저려오는 손끝 장차 무엇이 될까 곰곰 생각하고 생각했던 돌각담 물달개비꽃 꿈이었네. (그림 : 김윤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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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월 - 파냄새 속에서시(詩)/서지월 2014. 10. 1. 00:52
정작으로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 있다면 파냄새 속에 흥건한 어머니 치마폭 같은 훈훈한 바람드리워진 하늘의 사상(思想)과흙빛으로 물드는 노을, 저문 밭둑에 아무도 휘파람 부는 이 없어도 세월은 파꽃처럼 피었다 지고새로 돋아나는 파냄새의 이랑 사이실눈 뜨고 봄은 오건만 먼길 걸어온 나비들의 靑山에 깃들기 전 조금씩은 나래 접어 눈물을 심고 가는 길나는 그 파냄새 속에서 코고무신 끌고 오시는 어머니의 갸름한 모습을 지난밤 꿈속에서도 보았었네. (그림 : 김대섭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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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월 - 첫 뻐꾸기 울음소리시(詩)/서지월 2014. 10. 1. 00:51
누이의 버선코를 돌아서 오는 것 같네. 빨랫줄에 널린 빨래 더욱 눈부신 대낮, 후미진 골짜기마다 혼(魂)불 놓아 사월이라 초파일 엄마는 절에 가시고 나는 그 소리 들으며 대청마루에 앉아 댓돌 보네 댓돌 보네. 곳간 절구방아 멈춘 지 오래 병풍 가린 문간방에 잠든 누이야 사푼사푼 걸어나와 하늘을 보아라 서낭당 내 너머 꽃구름 피고 극락세계 부처님 행차하신다. 청산은 왼몸으로 초록저고리 초록저고리 옷고름 연등 날리는 날 춘향이 언제 살아 죽었단 말인가 우리 누나 어느 봄날 저승 갔단 말인가 아른아른 비쳐오는 하늘 한자락 천운사(天雲寺) 탑을 돌아 바스라지는데 홍진에 죽은 누이 하마 울까 웃으실까, 스란치마 깃을 치는 첫 뻐꾸기 울음소리. (그림 : 이혜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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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월 - 설날 아침에시(詩)/서지월 2014. 10. 1. 00:46
얼음 꽁꽁 언 시냇가 논둑에서 연 날리던 시절 가고 없어도 세배하러 새벽부터 일어나 아버지 어미니꼐 절 올리던 대청마루바닥 얼음장 같이 발 시리긴 해도 그때 그날들이 그리운 것은 내가 어른이 되어서 알겠네 장롱에서 몇 번씩이나 꺼내 입어보던 때때옷과 설 전 날 밤 자면 눈썹이 흰 눈 내린 먼 산처럼 허옇게 센다는 어른들의 말씀 감쪽같이 속았어도 신기하기만 하던 그때 그 시절, 되돌릴 순 없어도 생각하면 명경처럼 늘 맑고 환하게 비쳐오는 어린 날의 아버지 어머니 잊을 수가 없네 지금은 먼 산자락 차가운 흙 속에 계시고 아이들이 줄줄이 아빠 엄마 하며 따라도 다가오는 세상은 더욱 삭막하기만 하고 매냥 눈 내리는 설날이 와도 자식보다 이승 뜨신 부모님 생각에 더욱 눈시울이 뜨거워 옴을 나는 알겠네 (그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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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월 - 바람불어 좋은날시(詩)/서지월 2014. 10. 1. 00:30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색동저고리 날리는 바람이 분다 어느 땐들 우리가 한 식구 한 솥에 밥 아니 먹고 북채 장구채 골라잡지 않았으리요만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꽃 떨어지기 전에 부는 바람 임 보는 바람 꽃 떨어지고 부는 바람 열매 맺는 바람 백두산의 진달래꽃 피어서 꽃구경 가는 날 으스러진 강물이 땅을 울리고 으깨어진 어깨가 춤을 춘다 이 강산 햇빛 나고 구름 좋은 날 구름 위의 새소리 맑게 뚫리는 날 쓰린 발 쓰리지 않고 저린 손 저리지 않고 목마름도 피맺힘도 한풀꺾인 목숨이라 샘물 퍼내어서 버들잎 띄워 마시고 숨막히는 산고개도 넘어보면 훤한 이마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연지 찍고 분바르고 귀밑머리 날리는 바람이 분다, 소나무 가지 위에. (그림 : 신범승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