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정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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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첫날밤시(詩)/정윤천 2015. 6. 11. 11:28
누구도 중신 선 일 없다는데 지들끼리 눈 맞춰 입도 맞췄다는데 때깔 곱던 윗말 김가 딸내미 여울물 닮은 삼삼한 눈빛 볼우물 깊던 그 값 했다는데 아랫골 알부자 조생원댁 외아들이고 보면 연애도 한번 알토란으로 저질렀다는 동네 아낙들 농지거리가 빈말만은 아니었는데 처지 나는 집에, 그것도 손 귀한 집으로 무망간에 딸년 들인 윗말 김가 처는 첫날밤 늦저녁 토방가에 별빛 불러 축원했는데 떡두꺼비 고추도 서넛 구시렁구시렁 빌고 시어른 남편 사랑도 고시랑고시랑 빌었는데 모두 다 잠든 그 밤의 뒤끝을 한 사람은 오래 남아 뜬눈 밝혀서 두세두세 지새웠는데 아는지 몰라라 팔베개로 진한 잠 든 신랑각시야 저 방문 밖의 바람 소리 닮은 그 누구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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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한평생시(詩)/정윤천 2015. 6. 11. 11:26
- 어머니 하나 울 엄니는 열아홉 봄날 아침에 먼 길을 오셨답니다 그날 아버지네 마을의 햇볕들은 참으로 따뜻이 눈에 부셨고 마당가 꽃잎 틔운 살구꽃 그늘 그 아래 소년처럼 웃고 서 계셨던 아버지의 처음 모습을 울 엄니는 지금도 총총 기억하고 계신답니다 달뜬 울 엄니의 귀언저리에 홍시빛 부끄러움의 찐한 물이 들고 물든 그 가슴을 열어 난생 처음인 아버지를 맞던 첫날밤, 뒤채이며 새운 이른 새벽참엔 암도 모를 눈물도 한줄금 떨궜더랍니다 그렇게 하여 울 엄니는 그 집의 감나무 가지 하나 이쪽에서부터 저쪽의 살구나무 가지 하나 그 거리만큼 넉넉한 빨랫줄을 한 줄 내걸었더랍니다 빈 빨랫줄 위로 울 엄니의 평생의 날들이 물기 많은 빨래가 되어 지나갔는데 저 먹을 것 없었던 날들도 가고 저 깜깜밤중이었던 날들도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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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옛집 마당에시(詩)/정윤천 2015. 6. 11. 11:24
바람도 한바탕 씽씽 불어라 세차도록 칼칼히 시원스레 불어 우리들 뛰놀았던 대숲 언저리 죽순 같은 희망으로 뾰족한 그리움으로 흔들어 들깨울 것들 죄다 깨워라 할머니의 텃밭 가득 토란은 살쪄 알이 굵고 마늘은 여물고 상추꽃은 쇠어서 허옇게 허옇게 머리 풀고 날려라 굴뚝엔 연기 오르고 사랑엔 등불 밝혀서 그날 밤 뒤란 가득 탐스런 감꽃들도 수북이 쌓이거든 쓰러진 토담벽 울타리를 넘어 수심 서린 잔별들도 총총히 밝고 주름 많은 빨래를 펴던 어머니의 방망이질 소리 당신의 깊은 한숨 소리에 마당도 한쪽 폭삭 꺼져라 부엌에는 도둑고양이 마루 밑에 새앙쥐 뒤주 아래 두꺼비 확독 곁에 씨암탉 싸움도 한판 설크러지고 풀기 없는 오랜 고요를 깨워 앞산도 쩡쩡 이마를 쳐라 어수선한 대청마루 신발 흐트러진 토방 끝까지 성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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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춘양행(春陽行)시(詩)/정윤천 2015. 6. 11. 11:21
키 높은 미루나무 들길 꾸불텅 지나 석정리 큰고모네 처음 갔을 때 고모는 살가운 마음 주름진 눈매에도 어려 그날따라 닷새장, 해어름 파장터에서 당신의 속마음 닮은 두툼한 털실 스웨타 한 벌 말없이 내게 사 입혀 주시더니 처녀적의 보름달 둥근 얼굴로 왠지 그렇게 환해지시고 말았던가 식구들 해저녁의 저문 기다림 속으로 납석광 겨운 일 늦은 덥수룩한 고숙은 오종종 키 작은 걸음 기우뚱 비틀려 오셔 어따! 요놈 누구냐 많이 컸구나...... 매큼한 막술내음 끼친 횡설거림 길고 어언 나는 서른녘, 그날의 고숙을 닮은 고단한 월급쟁이 행색 심심찮게 읍면 구석에 출장 나댕겨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오늘은 춘양면春陽面 간다 춘양면(春陽面) :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그림 : 김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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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그 꽃밭 속시(詩)/정윤천 2015. 6. 11. 11:18
이른 저녁 푸른 바람 속 그 자리였던가요 우물 앞 평상 위에 동그랗게 피었던가요 단내음 물씬했던 속살 한입씩 베어물면 입술들은 다투어서 꽃술로 붉었던가요 때맞추어 지붕 위로 달꽃 덩달아 환해오면 싸리울 담장 가득 별꽃들도 뒤질세라 두세거렸던가요 그 꽃밭 속, 오물고물 이빨 없는 할미꽃 한 송이 희끗해진 울 아부지 주름꽃 또 한 송이 귀밑머리가 서늘해진 울엄니 그늘꽃의 꽃그늘 아래 누이들 사춘의 분홍물 가슴 위로 연한 수박향의 목덜미 근처 눈길 가닿고 나면 그 꽃밭 속 내 이름도 한 송이 꽃이름이고 싶었던가요 먼 길 휘돌아 날고픈 큼직한 날개의 꽃잎 한 장 가슴엔 듯 품었던가요 그 꽃밭 속, 우물가 평상 위로 한 저녁의 식구들 동그랗게 둘러 앉아 영락없는 제 모습만큼씩 오종종 맺혀 있던 거......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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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어디로숨었냐, 사십마넌시(詩)/정윤천 2015. 6. 10. 12:04
시째냐? 악아, 어찌고 사냐. 염치가 참 미제 같다만, 급허게 한 백마넌만 부치야 쓰것다. 요런말 안헐라고 혔넌디, 요새 이빨이 영판 지랄 가터서 치과럴 댕기는디, 웬수노무 쩐이 애초에 생각보담 불어나부렀다. 너도 어롤 거신디, 에미가 헐 수 읎어서 전활 들었다야. 정히 심에 부치면 어쩔수 없고…… 선운사 어름 다정민박 집에 밤마실 나갔다가, 스카이라던가 공중파인가로 바둑돌 놓던 채널에 눈 주고 있다가, 울 어매 전화받았다. 다음날 주머니 털고,지갑 털고, 꾀죄죄한 통장 털고, 털어서, 다급한 쩐 육십마넌만 부쳤다. 나도 울 어매 폼으로 전활 들었다. 엄니요? 근디 어째사끄라우.해필 엊그저께 희재 요놈의 가시낭구헌티 멫푼 올려불고 났더니만, 오늘사 말고 딱딱 글거봐도 육십마넌빼끼 안되부요야. 멫일만 지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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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일요일(맑음)시(詩)/정윤천 2015. 6. 10. 11:50
오늘 엄니가 산밭일 가신 할매한테 새참 심부름 갔다와야 헌다고, 아침부텀 미리 닦달 같은 다짐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공회당 뒷골목으로 딱지 치러 갔다가, 하필이면 빵삼이나 똥필이 같은 자식들한테 왕창 잃어버리고, 열불은 나고, 앞뒤 모르고 해름 참까지 거기서 뒹굴다가, 할매는 기어코 새참도 놓치고, 나는 저녁이 다 늦어 집에 와서 회초리 일곱 대나 맞았다. 본래는 열 대 친다 그랬는데, 그나마 중간에서 할매가 뜯어말겨 세 대는 이익을 보았다. 이담부텀 절대로 공회당 뒷골목으로 딱지 치러 가지 않아야겠다. (끝) 일기장 검사받는 날 하루 앞두고 '일요일(맑음)'까지 감쪽같이 짜 맞추어 놓기는 했던 것인데, 그러고도 나는 공회당 뒷골목으로 딱지 치러 2백 번도 더 넘게 갔다 왔을 것인데, 회초리도 아마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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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애기 똥 맞아시(詩)/정윤천 2015. 6. 10. 11:40
길가에 애기똥풀 꽃 폈습니다 30년 전에도 꼭 이처럼 펴 있었습니다 하굣길이 같았던 정님이 고 가시내는 궁금한 것도 참 더럽게 많았습니다 어쩜 이렇게도 이쁜 꽃더러 애기똥풀이라 붙였을까고, 따지듯이 나한테 물었습니다 하필이면 똥꽃이라 붙였다냐고 눈꼬리도 제법 샐쭉하게 치켜다보았습니다 내가 아냐, 나도 잘 모르겠다고 옷소매 잡아끌며 길 재촉 서둘렀는데 애기 똥 맞다고 애기 똥 맞다고 지나가는 할머니가 고개 주억거려주었습니다 장바구니 내려놓고 할머니도 똥꽃에 눈길 주었습니다 꽃대궁이랑 살째기 꺾어보면 참말처럼 공갈처럼 애기 똥 물 비칠 거라 하였는데 그 말씀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 참견 맞아 맞아 하는 듯이, 꽃잎은 바람결에 살랑거렸습니다 30년 지나서 나도 누구에겐가 애기똥풀 일러주는데 꽃잎은 꼭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