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정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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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토란잎 우산시(詩)/정윤천 2014. 8. 2. 21:14
토란잎 우산 한번 받쳐보지 않은 사람과는 추억에 대하여 거래하지 않을 작정이네. 어쩌다가 빌어썼거나 빌려주었던 일 해결하러 가는 길 아니라면, 그에게라면 오리길인들 멀어 보일 것 같았네. 때로는 어느 후미진 길 모퉁이쯤이던가, 수수로운 바람의 손사래질처럼이나 ‘그리움’이라던 쑥스러운 호명 하나가, 그 옛날 토란잎 우산 같이 마음에 차오를 수도 있었네. 그런 일 전혀 상관없다면, 사소하다면, 자네와도 어울려 밤낚시 핑계 삼은 어느 은밀했을 원족(遠足)의 궁리에서도 뒤에 처질 듯 싶었네. 토란잎 우산이라니, 그게 어디 우산이었겠는가. 어깨도 벌써 다 젖어버리고, 이마 위엔들 찬 빗방울도 토닥였던 것이지.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우리들이 이후로도 오래 견디며 살아가야 할, 흐린 하늘의 저쪽에다 치받아보았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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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시(詩)/정윤천 2014. 1. 1. 13:30
눈 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혼자서 부르며 왔던 어떤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만을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서늘한 열망의 가슴이 바로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속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그기 이 세상을 한꺼번에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과도 같았을, 그런 일순과의 마주침이라면, 이런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바로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손가락 빗질인양 쓸어 올려보다가, 목을 꺽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사코 진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구름에라도 실려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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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토란잎 우산 같은 것에 대하여시(詩)/정윤천 2014. 1. 1. 13:22
아직도 그런 게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토란잎 우산 같은 것에 대하여 한 번쯤은 이야기하고 갔으면 싶어지네 어느 수수롭던 바람의 길 모서리쯤이던가, 어쩌다 토란잎 우산과도 닮았던, 푸릇한 일순이 불쑥 떠올라주거나 흔들리기도 했던 날이 있었다네 그게 어디 우산이었겠느냐만, 어깨도 벌써 다 젖어버리고 이마에 찬 빗방울도 토닥였던 것이었지만, 토란잎 우산과도 같았던 것들이여, 그것들은 어쩌면 우리들이 이후로도 오래 견디며 살아가야 할 찌푸린 세월의 저쪽에다 치받아보았을, 그 중에서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았을, 한 잎의 까마득한 그리움일 수도 있었다네 (그림 : 김회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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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십만 년의 사랑시(詩)/정윤천 2014. 1. 1. 13:18
1 너에게로 닿기까지 십만 년이 걸렸다 십만 년의 해가 오르고 십만 년의 달이 이울고 십만 년의 강물이 흘러갔다 사람의 손과 머리를 빌려서는 아무래도 잘 헤아려지지 않을 지독한 고독의 시간 십만 년의 노을이 스러져야 했다 2 어쩌면, 십만 년 전에 함께 출발했을지 모를 산정의 별빛 아래 너와 나는 이제서야 도착하여 숨을 고른다 지상의 사람들이 하나 둘 어두움 속으로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하였다 하필이면 우리는 이런 비탈진 저녁 산기슭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서로를 알아보게 되었는가 여기까지 오는데 십만 년이 걸렸다 잠들어 가는 지상의 일처럼 우리는 그만 잠겨져도 된다 더이상의 빛을 따라 나서야 할 모든 까닭이 사라졌다 3 천 번쯤 나는 매미로 울다 왔고 천 번쯤 나는 뱀으로 허물을 벗고 천 번쯤 개의 발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