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정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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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늙은 약사를 만나고 왔다시(詩)/정윤천 2015. 6. 11. 11:52
이웃집의 일로 공음에 다녀 오는 길에 면소의 약국에 들렀다 근육통(筋肉痛)은 한 사흘째 목울대 아랫쪽으로 똬리를 틀었고 파리똥이 낀 선반 위에서 먼지 둘러쓴 물 파스 상자를 더듬고 있는 약사의 손길은 또 한참이나 더디다 초점이 머언 눈빛 속으로 불현듯 내게도 들켜오던 초로의 날들이 느리게 느리게 거스름 돈을 헤아리고 있을 즈음에 이르면 어느 후미진 마을의 지명과, 그 곳의 사람들과 함께 느린 몸짓으로 세월의 더께를 둘러 쓴 잔잔한 그의 등 뒤에서, 나는 늙은 약사를 만나고 왔다 무엇들과 함께 어깨를 걸고 스스럼 없이 저물어 가는 일이 때로는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웃 집의 심부름같은 것으로 공음에 다녀 와야 하는 행위같은 것일지라도 혹여 억울한 마음으로 쓸쓸해 하지는 말라는듯이 길 가엔 말없이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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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마흔 살 너머, 새벽 기차시(詩)/정윤천 2015. 6. 11. 11:48
이른 기차는 대개 먼 길을 달려와 그 기인 동체며 차창에 성에꽃 하얀 누비 옷을 입고 있기 쉽상이다마흔 살 너머, 한 새벽의 기차 기차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일로 들고나는 것이겠지만 누군가는 더러 이 나이의 기차를 오르며 왠지 마음에 간직했던 내의(內依)같은 것이라도 한 벌꺼내들고 싶어지는 것이어서 그리하여 사는 일이 어쩌면 길고도 오랜 먼 길의 배회였거나,추운 거리를 지나 역에 닿는 발걸음이 또한 단지 기차에게만 주어진 쓸쓸한 배역만은 아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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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순간의 화음(和音)시(詩)/정윤천 2015. 6. 11. 11:42
산이(山二)라는 면소의 풀길 위에서 아무래도 잘못 든 것만 같은 길을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초입부터 한참이나 에돌아 왔노라고 이제 갓 중학교에 들어갔음직한 맨 종아리가 붉은 소녀는 아슬한 손사래짓 추켜세워 왔던 길 돌려세우려는데 손 끝 따라 바라본 고개 너머 하늘이 어쩌면 저렇게도 흘러내릴 것만 같은 황토 빛이다. 일순보다도 더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다만 그 하늘빛만으로, 잡스런 세상일이 무망해지고 만 두 사람의 눈길이...... 사위가 온통 먹먹한 정지에 휩싸이고 말았을 때 가야 할 길의 행방 같은 것이야 아예 심중에서 사라져 버리고 없었던 것이다. (그림 : 성하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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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나는 아직 사랑의 시를 쓰지 못하였네시(詩)/정윤천 2015. 6. 11. 11:40
마땅히 사랑이라면 한사코 뒷날의 아침을 예감해야 하는 일이었네 거기 그렇게 굳세게 푸르러 오는 수만 평의 대지 위에 아프게 뿌리 내리고, 쓰라리게 잎자리 튀워야 할 세월의 무늬 또한 아로새겨볼 일이었네 하여 사랑이라면 애써 지워보려고 눈을 감아도 어찌할 수 없는 상사(想思)의 시간은 저 먼저 와서 가슴으로는 그 사이 만산의 홍엽같은 속수무책의 물들어 버림이기도 할 일이었네 때로는, 넘어지고 일어나 그래도 가야만 될 막막한 밤길의 행로 소슬한 바람의 발자국 소리 곁에서도 마침내 뚝뚝 듣던 차디찬 빗소리 곁으로도 그러나 짐지기로 한 무거운 기약일 수 있겠네 사랑이라고 이름 지워준 이 화인(火印)의 노래는 지는 꽃잎의 서리 내린 계절에서도 폭염의 너울 깊은 지친 햇살 아래서도 반드시 그 하늘은 푸르르겠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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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폐역시(詩)/정윤천 2015. 6. 11. 11:34
기차는 이제 오지 않았지 하역장 앞의 밥집들은 문을 닫았고 삐비꽃이 허연 그날의 언덕 위에 서서 나직하게 멀리 저쪽을 불러도 공산처럼 컴컴한 목청으로 늙은 똥개 한 마리 온 밤을 울어주었을 뿐 보름달 봉긋한 가슴의 옛 누이 하나 댓잎 술렁이는 삽짝 앞에 그때처럼 하얀하니 웃어주지 않았지 먼지 부는 정미소 골목 바람 찬 공터 위에는 깨진 소주병만 하나 취한 인부의 악다구니도 들리지 않고 불 내린 역사의 적막 곁으로 기차는 오지 않았지 누군가 일구다 떠난 빈집의 텃밭가에는 절로 자란 마늘꽃만 몇 잎 허옇게 머리를 풀고 새로 난 신작로를 따라 하행의 밤차 한 대가 머언 하행 속으로 사라져 이내 보이지 않을 때 까지기차는 이제 다시 오지 않았지. (그림 : 김지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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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봉식이의 밥시(詩)/정윤천 2015. 6. 11. 11:32
봉식이의 밥 한 그릇 보았습니다 엽차 놓고 가는 뻣센 말투에 서린 멀고 가난한 그의 고향 필시 한때는 그가 목욕탕의 때밀이였다는 걸 여인숙의 조바였다가 시장통의 배달꾼이기도 했다는 걸 생채기 많은 그의 손등어리가 들켜주기도 하였습니다 오늘은 어쩌다 밥집의 똘마니로 나와 만나져서 손님 끝나고 때늦어 제 앞에 돌아온 그의 밥 보았습니다 등쳐먹고 빼앗아 먹는 밥 헌 밥 주고 새 밥 바꿔 먹는 밥 놀면서 헤헤거리면서 얼렁뚱땅 삭이는 밥 너무 많이 우겨넣어 결국엔 게워내야 하는 밥 이런 밥들 처처에 자꾸만 겪고 살다가 그날 외지 갔다 오는 늦은 밥집에서 그의 밥 만났습니다 보란듯이 그 밥에서 김이 오르고 깍두기 우적우적 입맛나서 봉식이 고픈 뱃구레 빵빵히 가득 채워두는 듯싶었습니다 내 밥 뒤에서, 그의 밥 틀림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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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인례시(詩)/정윤천 2015. 6. 11. 11:30
그랬어야 너를 문득 기억하다가 잠에 들었던 밤이면 쑥국새 울음소리 닮은 쓰라린 기억 여직 꿈속에서도 상기 선연했어야 그냥 떠올리는 일 하나만으로도 눈물 금새 비쳐오던 내 열여섯의 저쪽, 봉긋한 첫사랑의 부끄럼일랑 결국은 네게 바치지 못하고 말았지만 거기 옛날 같은 우리들의 푸른 하늘이야 철없던 가시내의 노을 뜬 가슴같이 모진 한순간에 쉬 변하지 않겠지야 나는 이제 우리들이 자주 갔던 오디밭 지나 애장터 돌각담 위에 파릇이 맺혀 있던 그날의 새침한 들쑥이 아니고 인례가 아니고...... 언젠가 내게 손목잡혀 나섰다가 너는 먼산 알뫼봉 뽁데기 보고 있거라 살짝꿍 몰래 돌아앉아서 조심스레 찔끔찔끔 오줌 누었던 자리에는 새초롬한 부끄럼으로 귀밑볼도 환히 붉혔을 인례의 흔적 하나 아직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