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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순미 - 비의 검객
    시(詩)/손순미 2020. 3. 23. 17:38

     

    비의 칼날이
    비의 검객이
    저 거리에 저 건물에 활보한다
    없이 사는 것도 서러운데 가난한 자의 지붕에
    불행한 자의 가슴에 더욱 세차게
    무수한 칼날을 꽂는 것이다
    바람의 도포를 입은 비의 검객이 기승을 부린다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가로등을 쓰러뜨리고
    거친 호흡의 비가 쉬지 않고 내린다
    모두가 그 비를 피해 문단속을 하거나
    소주를 마시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불길한 행복을 조립하거나
    에라 모르겠다 지짐이라도 부쳐먹자
    고양이와 개들도 후미진 구석에서 가끔 밖을 내다볼 뿐이다
    그래도 저 비를 뚫고 어디론가 바삐 가는 사람들은
    비의 공포보다 두려운 삶의 협박을 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과다하게 행복을 부풀리며 그들은 빗속을 뚫고 간다

    비가 그쳤다
    비의 칼날이 비의 검객이 쓰러진 자리에 눈물이 흥건하다
    실체도 없이 우리를 위협하던 그것이
    그저 눈물에 지나지 않는 그것이
    어디론가 흘러간다 콸콸 울며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이다
    밤새도록 하수구에서 비의 울음을 들었다

    (그림 : 김주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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