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손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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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수국꽃시(詩)/손순미 2015. 5. 2. 21:31
절 마당 수국꽃 비를 맞는다 수국꽃 위에만 도착하는 비 칠월의 긴 손가락이 수국의 창백한 뺨을 두드린다 비에다 제 뺨을 온전히 내어주고 있는 수국 눈물을 가두어둔 듯 비는 흘러내리지도 못하고 꽃잎에 갇혀 있다 수국이 울고 있다 벽에 이마를 대고 울고 싶은 사람을 위해 수국의 눈썹이 저렇게 떨리고 있다 눈물에 이르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몸부림을 쳤나 쏟아지는 비에 수국은 파리하게 젖어간다 나는 저 어린 꽃에게 다가가 살며시 우산을 씌워주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다들 화려한 꽃세상 같지만 어디선가 간장같이 짠 눈물을 흘리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눈물은 상처에 바치는 공양이다 비가 그치고 수국꽃에 연등처럼 불이 들어온다 (그림 : 이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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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청사포 사진관시(詩)/손순미 2015. 5. 2. 12:00
바다가 전용 배경인 사진관은 비어 있다 가끔 파도가 들렀다 가고 벽에는 찾아가지 않은 사진들이 유물처럼 걸려 있다 그들은 추억을 포기한 것이다 점포세가 놓인 사진관은 종일 손님이 들지 않는다 그들 삶은 다시 인화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밀물다방 오토바이 커피 대신 레지를 날라대는 소리 포구를 밀고 간다 해의 긴 렌즈가 사진관을 포착한다 활어차가 지나가고 생선장수가 지나가고 술취한 사내들이 지나가고 저녁 어스럼도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하다가 고무대야에 얹혀 간다 어디에도 정박되지 못한 사람들이 뱃머리를 돌리며 사진관쪽을 건너다 본다 삶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해의 긴 렌즈가 남아 있는 빛 마저 찍어간다 깜깜한 포구는 거대한 암실이다 사진관은 그 암실에 맡겨진다 밤새 현상된 풍경은 사진관에 다시 내걸린다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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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페인트공시(詩)/손순미 2015. 5. 2. 11:36
그의 거주지는 늘 허공이었다 그는 종일 허공의 벽을 타고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허공에서만 전시되었다 지상의 사람들은 그 허공을 정원이라 여기며 그에게 팽팽한 밧줄을 던졌다 그의 정원은 위작이거나 모작이었다 그의 부리가 닿을 때마다 꽃들은 있는 힘을 다해 붉어졌다 정원은 완전한 봄이 되었다 지상의 사람들이 완성된 정원을 보고 박수를 쳤다 허공에 태어난 정원은 잎이 지지 않고 꽃이 시들지 않는 지루한 기쁨으로 가득 찼다 무거운 날개를 열고 그가 잠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림 : 송준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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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저녁의 환(幻)시(詩)/손순미 2015. 4. 30. 21:49
문을 두드리는 그림자 한 뭉치 어둠을 전해주고 우체부처럼 사라진다 봉투 속에서 두툼한 어둠이 흘러나온다 바람에 부풀려진 어둠이 야경을 돌며 차례로 불빛을 호명하고 일제히 검은 모자를 쓴 상점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대답처럼 네온을 켠다 무명의 상표들이 물끄러미 사람을 쳐다본다 유리알처럼 맑은 계집애들의 웃음소리가 윈도우를 흔들고 지나간다 늦은 저녁이 뒤따라간다 호주머니 속에서 남아 있는 길을 꺼내본다 꾸깃한 길이 비로소 허리를 편다 (그림 : 김정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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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미포에게시(詩)/손순미 2015. 4. 30. 21:39
낮별이 떴을 것이다 달맞이 꽃이 피었을 것이다 파도와 바람이 벽돌을 들고 날뛰는 소리 들릴 것이다 기차가 긴 허리를 비틀며 뭐라 고함치며 지나가던 시절, 비틀어 보았을 것이다 그 때 떠나가는 남자에게 욕을 하던 여자도 추억에 벌금을 내고 있을 것이다 생선국 냄새가 좋은 식당에 누가 모여 있을 것이다 간밤에 배를 타고 나간 김씨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어둡게 밥 먹을 것이다 포구에 엎드린 딱정벌레 배들, 잠잠 시무룩 할 것이다 은퇴한 해녀가 일구는 텃밭은 뜨거울 것이다 물조루에 쏟아지는 것은 물이 아니라 불일 것이다 사라진 집들과 기둥들은 그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것이다를 밀고 미포는 자꾸 어딘가로 가고 있을 것이다 미포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 1015-9 해운대해수욕장 옆 포구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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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자갈치 밥 먹으러 가자시(詩)/손순미 2015. 4. 30. 21:37
연탄불에 고등어를 구워주는 식당이 있다고 했다 생선 좌판을 지나 건어물 가게를 지나 사내 하나가 허겁지겁 밥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고등어가 익어가는 동안, 허술한 생각을 비워가는 동안 주인은 그에게 펄펄 끓는 시락국을 먼저 내주었다 혼자 먹는 밥이 서럽지 않으려면 국은 저렇게 뜨거워야 하는 것이다 낯선 사람끼리 익숙한 듯 밥을 먹는다 낯선 사람끼리 쓸쓸함을 비벼먹는다 비린내를 풍기며 기름내를 풍기며 뭐 어떠냐며 스스럼없이 마주 앉아 서로의 심장을 데운다 고등어 자반이 사천 원이라는 것 누구나 추웠던 한때를 기억한다는 것 사람들은 연탄불 같은 주인 여자를 실컷 쬐고 가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맑은 식사를 마친 그들이 뿔뿔이 뭉쳐 돌아간다 대 여섯 평이 될까 싶은, 연탄화덕이 간판인 그곳이 그들의 몸을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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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바닷가 마지막 집시(詩)/손순미 2015. 2. 23. 17:38
햇살이 꼬들하다 무거운 고요가 더러운 개 한 마리를 끌고 다니는 정오 빨간 다라이에 핀 접시꽃이나 본다 채반에 널린 납세미나 본다 상자같이 허술한 집에 건들건들 한 채의 배를 타고 앉은듯 달포째 저렇게 잠겨있는 사내, 이런 개…, 설핏한 나이에 죄다 욕으로 마시는 소주를 뭐라 말할까 모든 걸 다 떨어먹고 여기까지 와서 생이 이렇게 요약될 줄 몰랐다 그래 어쩔래, 나 이제 고집 센 쉰이다 창문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 사내를 닮은 집도 말이 없다 그 둘이 서로를 껴안고 있는 동안 사내는 선창가나 한 바퀴 돌까 말까 천막횟집에 상추쌈을 싸주느라 난리도 아닌 커플이 입이 찢어져라 좋아 죽는다 확, 불이라도 싸지르고 싶은 저녁이라면 어쩔 것이냐고, 파도 소리 귀에 고이도록 한 척의 사내 기우뚱, 서럽다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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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벚꽃 여자시(詩)/손순미 2015. 2. 17. 14:31
한 토막 평상에 엉덩이를 찍고 앉은 김씨 아코디언을 켠다 김씨의 세월이 그곳으로 다 몰려간 듯 아코디언은 주름진 몸을 펼쳤다 접었다 줄까 말까 배배 꼬는 여자처럼 풍만한 비애의 소리를 꺾어가는 중이다 봄이라는 게 처음부터 가려고 온 거지 캬! 소주처럼 차고 뜨거운 저 벚꽃 아래 한번쯤 강제로 눕혀보는 추억 같은 것! 벚꽃이 지려고 벚꽃이 피고 여자가 가려고 여자가 오고 당최 벚꽃이란 게 여자란 게 벚꽃은 잠깐 태어나 오래 죽어 아름다움을 괴롭히고 슬픔을 누리다 가고 아코디언 저 혼자 밤을 건너가는 소리 하! 오늘 벚꽃이 저리 분분하게 피어 어쩐지 그동안 지은 죄 탈탈 털어놓고 싶어 오지랖 떨어보지만 더럽게 깨끗한 척하는 저 벚꽃이란 여자 한꺼번에 그 색 다 써버려 허탈한 저 여자 너무 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