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손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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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자갈치 밥집시(詩)/손순미 2017. 8. 22. 23:48
연탄불에 고등어를 구워주는 식당을 찾아갔다 생선 좌판을 지나 건어물 가게를 지나 사내 하나가 허겁지겁 밥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고등어가 익어가는 동안 허술한 생각을 비워가는 동안 주인은 그에게 펄펄 끓는 시락국을 먼저 내주었다 혼자 먹는 밥이 서럽지 않으려면 국은 저렇게 뜨거워야 하는 것이다 낯선 사람끼리 익숙한 듯 밥을 먹는다 낯선 사람끼리 쓸쓸함을 비벼먹는다 비린내를 풍기며 기름내를 풍기며 어떠냐며 스스럼없이 마주 앉아 서로의 심장을 데운다 고등어자반이 사천 원이라는 것 누구나 추웠던 한 때를 기억한다는 것 사람들은 연탄불 같은 주인 여자를 실컷 쬐고 가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맑은 식사를 마친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돌아간다 대 여섯 평이 될까 싶은, 연탄화덕이 간판이 그곳이 그들의 몸을 오래도록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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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먼집시(詩)/손순미 2016. 10. 21. 10:49
문 밖엔 늦은 저녁이 서 있다 폐타이어가 엮어진 지붕 위 설익은 꿈이 자주 바람에 들춰져도 마음들은 꼭꼭 여미고 산다 가파른 골목을 밀고 온 지친 눈들 불빛을 당기고 부엌으로 들어간 식욕은 세간을 달그락거린다 시렁 위엔 칸칸이 달빛이 포개져 있고 간고등어 한 마리 온 식구들을 구워낸다 오순도순 둘러앉은 눈빛들 한 그릇씩 비워내는 얘기에 아랫목 온 기가 올라온다 식구들 한 이불의 별빛을 덮고 자면 어둠이 풀풀 새어나오는 집집이 몇 채의 꿈을 꾼다 신발들 저희끼리 내일을 쓰윽 신어본다 (그림 : 김정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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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자귀나무 그 집시(詩)/손순미 2016. 10. 21. 10:47
우리는 염소처럼 집 주위를 맴돌았다 넓은 마당에 별 같은 꽃들이 돋아있고 텃밭의 야채는 힘껏 솟아 있었다 주인은 온데간데없고 집 앞 자귀나무 가지에 푯말만 늘어지게 걸어놓았다 졸지에 부동산이 되어버린 자귀나무 우리는 자귀나무 처마 밑에서 주인을 기다렸다 자귀꽃 그늘 아래 연분홍 향기 은근하게 서성이고 우리는 새삼 오래된 신혼을 펼쳐보았다 해바라기가 우아한 목으로 지붕을 지그시 누르던 그 집 꿈을 꾸면 장난감 같은 허술한 집들이 와르르 언덕 아래로 쓸려가던, 생선장수가 헉헉 숨차 오르던 집 아이들이 상자 속의 사과알처럼 잠들던 집 때로는 그 집을 분실할까봐 주머니처럼 차고 다녔다 우리의 오늘은 그 주머니에서 나왔다 가난만을 상속받은 자들의 유토피아는 근로의 미덕이었다 우리는 한참을 지지배배 속살거리다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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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겨울 잠행시(詩)/손순미 2016. 10. 21. 10:44
새소리 하나 보이지 않는 산길을 걷는다 세상의 고요가 여기에 다 모였을까 정적으로 꽉 찬 숲, 잡목들의 숨소리마저 새어나온다 길은 산꼭대기까지 걸려 있고 어린 나무들은 누군가 풀어놓은 햇살을 덮고 쿨쿨 늦잠을 자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이불은 저 햇살이다 산의 가슴팍에 열매처럼 매달려 사람들은 말이 없다 추위에 옷섶을 여미다가 담배를 꺼낸다 입산금지라는 붉은 팻말이 섬뜩하다 이미 모든 것을 금지 당한, 산도 사람을 원하지 않을 때가 있다 지금은 희망도 휴식이 필요한 때 먼저 걸어간 나무들이 만세를 부른다 곳곳에 잠복해 있던 산의 소리가 한꺼번에 올라온다 환한 소리의 천지 이런 거대한 소리의 숲을 본 적이 없다 그 소리 능선을 타고 달린다 내 몸으로 다시 도져오는 삶의 핏줄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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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담벼락 속에 집이 있다시(詩)/손순미 2016. 10. 15. 02:04
그 집은 담벼락 속에 들어가 있다 햇볕이 아무렇게나 흘러 다니는, 담쟁이덩굴이 꽃처럼 피어있는 담벼락을 열어보면 허물어진 집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담벼락 속으로 집이 도망치던 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집의 내력은 보이지 않고 집이 서 있던 자리, 시퍼런 잡초와 썩어 나동그라진 기둥들 서로의 뼈를 만지며 세월을 굴린다 추억은 남아있을까 항아리를 들여다보면 구름이 누렇게 익어가고 세상은 집이 삭아가는 것을 방관한다 벽 속의 집은 봉긋하게 솟아난다 마당을 건너가는 풍금소리 몸을 찢어 잎을 내 보내는 나무들 투명하게 널려 있는 빨래들 우물 속으로 곤두박질친 두레박이 집 한채를 다 씻어내는, (그림 : 노재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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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한 벌의 양복시(詩)/손순미 2016. 10. 15. 01:52
한 벌의 그가 지나간다 그는 늘 지나가는 사람 늘 죄송한 그가 늘 최소한의 그가 목이 없는 한 벌의 양복이 허공에 꼬치 꿰인 듯 케이블카처럼 정확한 구간을 지키듯 신호등을 지나 빵집을 지나 장미연립을 지나 가끔 양복 속의 목을 꺼내 카악- 가래를 뱉기도 하며 한 벌의 양복으로 지나간다 대주 연립 206호 앞에서 양복이 멈췄다 길게 초인종을 눌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양복이 열쇠를 비틀어 철문 한 짝을 떼어내자 철문 속에 안전하게 보관된 가족들이 TV를 켜놓고 웃고 있었다 가족들이 양복을 향해 엉덩이를 조금 떼더니 이내 TV 속으로 빠져들었다 양복이 조용히 구두를 벗었다 한 벌의 그가 양복을 벗었다 모든 것을 걸어두고 나니 그저 그런 늙은 토르소에 지나지 않았다 한 벌도 아닌 양복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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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족두리꽃시(詩)/손순미 2015. 8. 29. 12:03
기장읍 청강리에 족두리꽃이 산다 철길이 석쇠처럼 달아오른 그 곳에 상자같이 조그마한 집에 사는 사람이 슬며시 내놓은 화분에 산다 아내가 없는 사람이 아내 같은 족두리꽃을 심어두었다 가진 거라곤 몸뚱이 밖에 없는데 그는 온종일 밥도 안 먹고 엎드려 있다 한 마리 생선처럼 엎드려 있다 족두리꽃 향기가 그 안을 기웃거린다 샹데리아 같은 족두리꽃이 화려한 족두리를 쓴 연분홍 향기가 아내처럼 사내 품 속을 파고든다 고통의 시간을 수없이 건너온 그들이 서로가 서로의 품 속을 파고들며 운다 우리 다시는 태어나지 말자, 태어나지 말자 (그림 : 진상용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