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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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내가 마실 갈 때시(詩)/나희덕 2014. 6. 19. 14:49
마음이 하수구처럼 꾸룩거릴 때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그곳에 가야지 나를 씻어줄 강물 있는 곳 물줄기도 즈이들끼리 만나는 그곳 어느날 내 발목을 끌러 마실 간다 양평장날에 왔던 아낙들 봉다리 몇개씩 들고 올라타자 버스는 강을 따라 시원스럽게 달린다 플라스틱 도시락, 설탕 한 포, 북어포, 그런 걸 사려고 강 따라 머리 날리며 그들은 마실을 나왔나 양수리에도 있을 그런 것들을 나는 못견뎌 양수리로 가는데 그 양수리에는 어떤 못견딤이 있어 이 버스 안, 조는 얼굴로 만나는가 급정거할 때마다 내 안에 출렁거리던 물결 창틀에 부딪혀 쏟아질 듯하고 양수리, 마실 나온 마음들이 스치는 곳 삶보다는 강물이 길게 흐르는 , 그곳 (그림 : 김정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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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구두가 남겨졌다시(詩)/나희덕 2014. 6. 19. 14:39
그는 가고 그가 남기고 간 또 하나의 육체 삶은 어차피 낡은 가죽 냄새 같은 게 나지 않던가 씹을 수도 없이 질긴 것 그러다가도 홀연 구두 한 켤레로 남는 것 그가 구두를 끌고 다닌 게 아니라 구두가 여기까지 그를 이끌어 온 게 아니었을까 구두가 멈춘 그 자리에서 그의 생도 문득 걸음을 멈추었으니 얼마나 많이 걸었던지 납작해진 뒷굽, 어느 한쪽은 유독 닳아 그의 몸 마지막엔 심하게 기우뚱거렸을 것이다 밑 모를 우물 속에 던져진 돌이 바닥에 가 닿는 소리 생이 끝나는 순간에야 듣고 소스라쳤을지도 모른다 노고는 길고 회오의 순간은 짧다 고래 뱃속에서 마악 토해져 나온 듯한 구두 한 켤레, 그 속에는 그의 발이 연주하던 생의 냄새 같은 게 그를 품고 있던 어둠 같은 게 온기처럼 한 움큼 남겨져 있다 날아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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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속리산에서시(詩)/나희덕 2014. 6. 19. 14:37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그림 : 신종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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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정도리에서시(詩)/나희덕 2014. 6. 19. 14:28
모난 돌은 하나도 없더라 정 맞은 마음들만 더는 무디어질 것도 없는 마음들만 등과 등을 대고 누워 솨르르 솨르르 파도에 쓸리어가면서 더 깊은 바닥으로 잠기는 자갈들 그렇게도 둥글게 살라는 말인가 아니다, 그건 아니다 안개는 출렁거리지 않고도 말한다 저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조각배는 뭍에 매어져 달아나지 못한다 묶인 발을 견디며 살라는 말인가 아니다, 그건 아니다 타오르지도 녹아 흐르지도 않는 안개 너머로 막막한 어둠의 등이 보이고 종일 돌팔매질이나 하다 돌아가는 내가 거기 보이고 (그림 : 한형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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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사라진 손바닥시(詩)/나희덕 2014. 6. 18. 17:52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회산 :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읍 복룡리 백련지마을 남도는 축복받은 땅이다. 기름진 땅은 풍요로운 농작물을 잉태하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강물은 그 생명을 키워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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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귀뚜라미시(詩)/나희덕 2014. 6. 18. 14:43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그림 : 이정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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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섶섬이 보이는 방시(詩)/나희덕 2014. 6. 18. 14:42
― 이중섭의 방에 와서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질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질을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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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시월시(詩)/나희덕 2014. 6. 6. 13:12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산문(山門)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 건 아닐까 하고, 머루 한 가지 꺾어 물 위로 무심히 흘려보내며 붉게 물드는 계곡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잎을 깨치고 내려오는 저 햇살 당신 어깨에도 내렸으리라고, 산기슭에 걸터앉아 피웠을 담배연기 저 떠도는 구름이 되었으리라고,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산문(山門)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 도토리, 청설모, 노란 풀꽃뿐이어서 당신 이름뿐이어서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 줄 당신은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그림 : 김성실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