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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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시(詩)/나희덕 2014. 1. 2. 11:37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그림 : 강석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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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산딸기 익을 무렵시(詩)/나희덕 2013. 12. 10. 12:44
아기를 들쳐 업은 한 여자의 흙 묻은 발꿈치를 따라 걷다가 나는 보았네 숨어서 익어가는 산딸기를 숨어서 도란거리는 지붕들을 입맞출 수도 없이 낮은 곳에 피어나 잎새 뒤에 숲 뒤에 숨은 작은 마을을 등에 업힌 아기가 울고 그 울음에 산딸기 좀더 익으면 땅거미가 내려와 붉은 열매를 감추는 저녁 흙 묻은 발꿈치를 따라 걷다가 나는 들었네 산딸기에게 불러주는 자장가를 무사하라 무사하라 부르는 그 노래를 녹슬어가는 함석 지붕 아래서 나는 들었네 (그림 : 이장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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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시(詩)/나희덕 2013. 12. 6. 22:19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그림 : 김한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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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길 위에서시(詩)/나희덕 2013. 12. 1. 10:22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그림 : 이영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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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땅 끝시(詩)/나희덕 2013. 12. 1. 10:21
산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렸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그림 : 안영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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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말이 잎을 물들였다시(詩)/나희덕 2013. 12. 1. 10:21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그림 : 안기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