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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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살아 있어야 할 이유시(詩)/나희덕 2013. 12. 1. 10:20
가슴의 피를 조금씩 식게 하고 차가운 손으로 제 가슴을 문질러 온갖 열망과 푸른 고집들 가라앉히며 단 한 순간 타오르다 사라지는 이여 스스로 떠난다는 것이 저리도 눈부시고 환한 일이라고 땅에 뒹굴면서도 말하는 이여 한번은 제 슬픔의 무게에 물들고 붉은 석양에 다시 물들며 저물어가는 그대, 그러나 나는 저물고 싶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이 떨어져내리는 시절이라 하지만 푸르죽죽한 빛으로 오그라들면서 이렇게 떨면서라도 내 안의 물기 내어줄 수 없습니다. 눅눅한 유월의 독기를 견디며 피어나던 그 여름 때늦은 진달래처럼 (그림 : 임갑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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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빈 의자시(詩)/나희덕 2013. 12. 1. 10:18
나는 침묵의 곁을 지나치곤 했다 노인은 늘 길가 낡은 의자에 앉아 안경 너머로 무언가 응시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로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이따금 새들이 내려와 침묵의 모서리를 쪼다가 날아갈 뿐이었다 움직이는 걸 한번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몸 절반에는 아직 피가 돌고 있을 것이다. 축 늘어뜨린 왼손보다 무릎을 짚고 있는 오른손이 그걸 말해준다. 손 위에 번져가는 검버섯을 지켜보듯이 그대로 검버섯으로 세상 구석에 피어난 듯이 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다는 일만이 그가 살아 있다는 필사적인 증거였다. 어느날 그 침묵이 텅 비워진 자리, 세월이 그의 몸을 빠져나간 후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빈 의자에는 작은 새들조차 날아오지 않았다. (그림 : 노태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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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기억의 자리시(詩)/나희덕 2013. 12. 1. 10:17
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그림 : 김현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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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찬비 내리고 (편지 1)시(詩)/나희덕 2013. 12. 1. 10:17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그림 : 안창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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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 때 (편지 2 )시(詩)/나희덕 2013. 12. 1. 10:16
세상이 나를 잊었는가 싶을 때 날아오는 제비 한 마리 있습니다. 이젠 잊혀져도 그만이다 싶을 때 갑자기 날아온 새는 내 마음 한 물결 일으켜놓고 갑니다. 그러면 다시 세상 속에 살고 싶어져 모서리가 닳도록 읽고 또 읽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게 되지요 제비는 내 안에 깃을 접지 않고 이내 더 멀고 아득한 곳으로 날아가지만 새가 차고 날아간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 때 그 여운 속에서 나는 듣습니다. 당신에게도 쉽게 해 지는 날 없었다는 것을 그런 날 불렀을 노랫소리를 (그림 : 김기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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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젖지 않는 마음 (편지 3)시(詩)/나희덕 2013. 12. 1. 10:16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 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는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그림 : 한천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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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그때엔 흙에서 흙냄새 나겠지시(詩)/나희덕 2013. 12. 1. 10:15
가야지 어서 가야지 나의 누추함이 그대의 누추함이 되기 전에 담벼락 아래 까맣게 영그는 분꽃씨앗 떨어져 구르기 전에 꽃받침이 시들기 전에 무엇을 더 보탤 것도 없이 어두워져가는 그림자 끌고 어디 흙속에나 숨어야지 참 길게 울었던 매미처럼 빈 마음으로 가야지 그때엔 흙에서 흙냄새 나겠지 나도 다시 예뻐지겠지 몇겁의 세월이 흘러 그대 지나갈 과수원길에 털복숭아 한 개 그대 내 솜털에 눈부셔하겠지 손등이 자꾸만 따갑고 가려워져서 (그림 : 이영희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