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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빈 의자시(詩)/나희덕 2013. 12. 1. 10:18
- 나는 침묵의 곁을 지나치곤 했다
- 노인은 늘 길가 낡은 의자에 앉아
- 안경 너머로 무언가 응시하고 있었는데
- 한편으로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이따금 새들이 내려와
침묵의 모서리를 쪼다가 날아갈 뿐이었다
움직이는 걸 한번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몸 절반에는 아직 피가 돌고 있을 것이다.
축 늘어뜨린 왼손보다
무릎을 짚고 있는 오른손이 그걸 말해준다.
손 위에 번져가는 검버섯을 지켜보듯이
그대로 검버섯으로 세상 구석에 피어난 듯이
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다는 일만이
그가 살아 있다는 필사적인 증거였다.
어느날 그 침묵이 텅 비워진 자리,
세월이 그의 몸을 빠져나간 후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빈 의자에는
작은 새들조차 날아오지 않았다.- (그림 : 노태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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