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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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흙 속의 풍경시(詩)/나희덕 2014. 3. 2. 11:12
미안합니다 무릉계에 가고 말았습니다 무릉 속의 폐허를, 사라진 이파리들을 보고 말았습니다 아주 오래 전 일이지요 흙을 마악 뚫고 나온 눈동자가 나를 본 것은 겨울을 건너온 그 창끝에 나는 통증도 없이 눈멀었지요 그러나 미안합니다 봄에 갔던 길을 가을에 다시 가고 말았습니다 길의 그림자가, 그때는 잘 보이지 않던 흙 속의 풍경이 보였습니다 무디어진 시간 속에 깊이 처박힌 잎들은 말합니다 나를 밟고 가라, 밟고 가라고 내 눈은 깨어나 무거워진 잎들을 밟고 갑니다. 더이상 무겁지 않은 生, 차라리 다시 눈멀었더라면 하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신비한 현호색은 진 지 오래고 그 괴경(塊莖) 속에 숨기고 있는 독(毒)까지 다 보였습니다 그걸 캐다가 옮겨 심지는 않을 겁니다 미안합니다 무릉계에 가더라도 편지하지 마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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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젖은 길시(詩)/나희덕 2014. 2. 20. 16:11
귀 밝아진 날에는 들을 수 있다 밭으로 가는 노인의 발소리를 물은 찰랑거린다 그의 푸른 물통 속에서 그가 밭에 도착할 때쯤이면 물통에는 물이 반만 남는다 반쪽에는 피가 도는 그의 몸처럼 물은 찰랑거리며 그의 낡은 바지를 적시고 마른 길 위에 매일 젖은 길 하나를 낸다 그 길은 오후가 되기 전에 사라져버리곤 했지만 사라진 길 위에 다시 젖은 길을 내는 그를 나는 어느새 상추나 쑥갓, 아욱처럼 기다리게 된 것이다 며칠째 그가 지나가지 않고 오늘은 내가 물통을 들고 그의 밭으로 갔다 그가 네 번 오갈 것을 나는 두 번 만에 물을 다 주었다 잘 자라난 상추나 쑥갓, 아욱, 파, 시금치들에게 그러나 돌아서는 순간 깨달았다 푸성귀들을 키운 것은 물이 아니라는 것을 반 통의 물을 잃어버린 그의 발자국 소리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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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꽃바구니시(詩)/나희덕 2014. 1. 2. 11:50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이 꽃들의 화음을. 너무도 작은 오아시스에 너무도 많은 꽃들이 허리를 꽂은 한 바구니의 신음을. 대지를 잃어버린 꽃들은 이제 같은 시간을 살지요. 서로 뿌리가 다른 같은 시간을. 향기롭게, 때로는 악취를 풍기며 바구니에서 떨어져내리는 꽃들이 있네요. 물에 젖은 오아시스를 거절하고 고요히 시들어가는 꽃들 그들은 망각의 달콤함을 알고 있지요. 하지만 꽃바구니에는 생기로운 꽃들이 더 많아요. 하루가 한 생애인 듯 이 꽃들 속에 숨어 나도 잠시 피어나고 싶군요. 수줍게 꽃잎을 열듯 다시 웃어보고도 싶군요.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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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방을 얻다시(詩)/나희덕 2014. 1. 2. 11:47
담양이나 평창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밭에서 막 돌아온 듯 머릿수건이촉촉했다. ㅡ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번 와서 일할 공간이 필요해서요. 나는 조심스럽게 한옥쪽을 가리켰고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ㅡ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만은 우리 이씨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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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저 숲에 누가 있다시(詩)/나희덕 2014. 1. 2. 11:45
밤구름이 잘 익은 달을 낳고 달이 다시 구름 속으로 숨어버린 후 숲에서는 ......툭......탁......타닥...... 상수리나무가 이따금 무슨 생각이라도 난 듯 제 열매를 던지고 있다 열매가 저절로 터지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입술을 둥글게 오므렸을까 검은 숲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말소리, 나는 그제야 알게도 된다 열매는 번식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무가 말을 하고 싶을 때를 위해 지어졌다는 것을 ......타다닥......따악......톡......타르...... 무언가 짧게 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박수소리 같기도 한 그 소리들은 무슨 냄새처럼 나를 숲으로 불러들인다 그러나 어둠으로 꽉 찬 가을숲에서 밤새 제 열매를 던지고 있는 그의 얼굴을 끝내 보지 않아도 좋으리 그가 던진 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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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해미읍성에 가시거든시(詩)/나희덕 2014. 1. 2. 11:41
해질 무렵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당신은 성문 밖에 말을 잠시 매어 두고 고요히 걸어 들어가 두 그루 나무를 찾아보실 일입니다 가시 돋힌 탱자울타리를 따라가면 먼저 저녁해를 받고 있는 회화나무가 보일 것입니다 아직 서 있으나 시커멓게 말라버린 그 나무에는 밧줄과 사슬의 흔적이 깊이 남아 있고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박혀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 많기도 하지만 하필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그 회화나무, 어찌 그가 눈 멀고 귀 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손끝은 그 상처를 아프게 만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더 걸어가 또다른 나무를 만나보실 일입니다 옛 동헌 앞에 심어진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 드물게 넓고 서늘한 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잊은 듯 웃고 있을 것이고 당신은 말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