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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젖은 길시(詩)/나희덕 2014. 2. 20. 16:11
귀 밝아진 날에는 들을 수 있다
밭으로 가는 노인의 발소리를 물은 찰랑거린다
그의 푸른 물통 속에서 그가 밭에 도착할 때쯤이면 물통에는 물이 반만 남는다
반쪽에는 피가 도는 그의 몸처럼 물은 찰랑거리며 그의 낡은 바지를 적시고
마른 길 위에 매일 젖은 길 하나를 낸다
그 길은 오후가 되기 전에 사라져버리곤 했지만
사라진 길 위에 다시 젖은 길을 내는 그를
나는 어느새 상추나 쑥갓, 아욱처럼 기다리게 된 것이다
며칠째 그가 지나가지 않고 오늘은 내가 물통을 들고 그의 밭으로 갔다
그가 네 번 오갈 것을 나는 두 번 만에 물을 다 주었다
잘 자라난 상추나 쑥갓, 아욱, 파, 시금치들에게
그러나 돌아서는 순간 깨달았다
푸성귀들을 키운 것은 물이 아니라는 것을
반 통의 물을 잃어버린 그의 발자국 소리였다는 것을.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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