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서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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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동지나물시(詩)/서안나 2017. 10. 20. 09:27
얘야, 이제 제상이 다 차려졌구나 이젠 너 혼자서도 할 수 있겠느냐 내가 몇 년이나 너에게 잔소리 할 수 있겠느냐 참. 나 죽거든 내 제삿날은 상 많이 차릴 것 없다 그냥 조선나물이나 데쳐 잘 볶은 된장이랑 한 상에 올려 놓거라 그도 귀찮으면 봄마다 동지나물 솟아오를 적에 노랑 치마저고리 입고 이쁘게 앉아 노래나 한 곡 불러다오 얘야, 나죽거든 서러워도 말아라 그럼 내가 무덤 속에서도 너를 달래야 하잖니 동지나물 : 제주도의 향토음식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음식이다. 제주도의 농촌에는 우영밭(집앞 텃밭)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 가족들이 먹을 채소를 주로 가꾼다. 제주도의 겨울은 춥지 않기 때문에 우영밭에 배추를 심었는데, 봄에 배추 꽃대가 올라오기 전에 뜯은 연한 노란 꽃을 동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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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비밀시(詩)/서안나 2017. 10. 20. 09:25
무언가를 깨달았을 때 희망은 너무 멀리 걸어가 있다 삶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삶의 진중한 무게를 짊어졌던 자신을 의심하지 말라 가끔은 뒤를 돌아보라 울고 있는 당신을 안아줘라 내가 없다면 세상도 없다 내가 있어서 세상은 바로 서는 것 늘 용기와 손을 맞잡고 다녀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별과 강아지와 풀과 태어나는 아이들을 따뜻한 눈동자로 바라보라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과 지혜로운 책을 가까이하라 나를 칭찬해준 사람을 기억하라 삶은 항상 당신 손 안에 있기도 하다 당신이 주무른 형상으로 빛을 내는 지혜의 흙 그릇이다 (그림 : 방정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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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아주반점시(詩)/서안나 2017. 10. 20. 09:17
국민학교 시절 운동회 날이면 아버지가 아주반점에서 자장면을 사주셨다 칠성통 로터리 아주반점 아주반점 짜장면은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고였다 복숭아씨가 주렁주렁 꿰어진 차일을 걷고 들어서면 절룩거리는 한쪽 발로 대륙을 넘어온 왕서방이 운동회 깃발처럼 번쩍이는 주방장 모자를 쓰고 인사를 건네곤 했다 왕서방 요리사복 안에는 금빛 비단옷이 번쩍인다거나 짜장면 속에서 손톱이 나왔다던가 자장면이 맛있는 건 사라진 아이들 때문이라는 등 아시아의 온갖 귀신 이야기가 간짜장처럼 꺼멓게 비벼지던 곳 아주반점에서 짜장면을 먹고 온 날은 프라이팬처럼 달궈진 미끄러운 꿈속을 조각난 야채처럼 밤새 귀신에게 쫓겨 다니곤 했다 아시아 대륙처럼 검었던 아주반점 자장면 자장면보다 짜장면이라 불러야 더 맛이 나던 70년대 온갖 귀신들이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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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편지였음을시(詩)/서안나 2017. 8. 5. 13:47
어떤 날은 화사하게 어떤 날은 처절하게 어떤 날은 행복하게 또 어떤 날은 아프게 피었다 진다 어떤 날엔 우체국 가는 길에 어떤 날엔 카페 앞 화단에 어떤 날엔 비 내리는 들에 어떤 날엔 황사 머무는 동네에 어느 곳에는 무리지어서 어느 곳엔 오롯이 혼자서 피었다 진다 어떤 때는 자전거 바구니 속에서 어느 때는 신문지 안에 싸여서 잘 사느냐는 잘 살아가라는 몇 마디 안부 대신 꽃으로 피었다 진다 이렇게도 많은 말들을 꽃물이 들 듯 썼다 지우고 지웠다 다시 쓰고 또 지우고 가는 심사를 정작 너는 모르더라는, 기억은 지워지는 게 아니라 스며드는 것이더라는 추신을 너는 왜 여지껏 읽지 못하고 있는지 꽃잎으로 떨구고 가는 마음을 어찌 너는 모르는지 (그림 : 김현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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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고랑 몰라 봐사 알주시(詩)/서안나 2017. 7. 27. 11:44
아주방 고랑은 몰라 마씨 이년 창시 터지는 건 직접 바사 압니다게. 이 노무새끼가예 얼마나 사람을 저들리는지 사람새끼 안될거 닮아마씨. 술 처먹어 그네 놈 자는디 강 유리창은 무사 부수아불 말이꽈게. 집에도 한한한 미깡 놔둬그네 놈이 밭 가그네 미깡은 무사 땀광. 집안에 돈 이신거 알민 그날은 어떻행이라도 돈 팡강 술을 쳐 마셩오니 요 노릇을 어떻허민 조우쿠가. 이추륵 허다그네 나가 먼저 돼싸짐적 해여마씨. 아방 어신거 불쌍허영 물질허멍 울멍 시르멍 키우당 보난 학교도 졸바로 댕기지도 안행 요보록 써보록 매날 바당에만 강 술먹곡 노래 불렀덴 햄수게. 하도 기가 막형 그 놈새끼 잡아당 물어 봐십쥬마씨. 니 무사 겅햅시니. 날 봥이라도 학교 졸바로 댕겨사 헐거 아니라. 어멍 속터졍 죽는 꼴을 봐사 니가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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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기억의 채널을 돌리지 말아요시(詩)/서안나 2017. 5. 7. 00:36
기억의 채널을 돌리지 말아요. 무대의 조명을 꺼버리지 말아요. 나는 당신의 추억속에서 언제나 데뷔를 시작하는 가수랍니다. 티브이를 켜고 채널을 돌리던 당신의 젊은 손길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내 노래에 맞추어 박자를 짚어내던 손가락의 짧은 주파수들을 기억하고 있어요. 내 귀에서 한다발의 악보들을 빼내어 보여 드릴까요. 내 눈동자 속에 담겨진 당신의 첫사랑의 곡조들을 연주할까요. 환호와 화려한 무대조명이 아직도 내 꿈속 구석구석을 밝게 비춰요 거품처럼 흘러다니던 악극단시절 난 노래 한 소절이면 배가 불렀어요. 사랑보다 노래가 더 간절했지요. 간절한 것들은 시간을 멈추게 하지요. 넓은 무대에서 당신과 난 하나였지요. 무대에는 언제나 꽃들이 피고 서러운 계절들이 성급하게 몰려들어요. 난 더 이상 꽃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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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11번 마을버스를 타다시(詩)/서안나 2017. 5. 7. 00:29
핸들이 꺾이면서 강변역에서 차가 한 쪽 방향으로 힘차게 쏠린다 졸음에 덜 깬 사람들의 하루가 버스 종점에서 뫼비우스 띠처럼 잠시 헝클어진다 운전대를 잡은 사내의 팔뚝에 힘줄이 불끈 솟는다 그의 삶도 한 곳을 향해 쏠린 적이 많았다 집을 떠나 상경한 서울에서 그는 마음 하나로 세상을 향해 내달렸었다 아무리 달려도 그는 출발점에 다시 도착하곤 했다 바퀴처럼 둥근 몸 하나로 결국 그는 자신의 노선을 이탈하지 못한다 꿈이 동전처럼 반짝거리는 여자를 만나 셋방 어둠 속에서 사랑이란 문을 함께 힘껏 열었다 이마가 희게 빛나는 영특한 아이들이 그에게로 다가와서 길이 되었다 밤이면 아직은 살아 볼만하다고 중얼거려주는 나이보다 늙은 아내가 때론 그의 문이 되어준다 가득 찰 수록 더 빨리 비어버리는 차고지의 아득한 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