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서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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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보쌈김치시(詩)/서안나 2017. 4. 7. 12:18
푸들거리는 허리 긴 개성배추 굵은 소금으로 간하면 색을 빼고 힘을 빼 겨울 풍경 받아들이네 고기 삶는 냄새 따스한 흉터처럼 흘러다니는 밤 매운 고춧가루 양념에 굴이며 대추와 잣 호두 뜨거운 삶은 고기 썰어 얹어면 보쌈김치 맵게 먹어 입술 붉은 아이들 살 오르는 소리 창 밖은 흰 눈 펑펑 내리고 보쌈김치 씹으면 한겨울 어둠에 이빨자국이 나네 세상 끝 양귀비 꽃밭 무너지는 소리 나네 보쌈김치 먹는 밤엔 애벌레처럼 순해지고 싶었네 자다가도 푸릇푸릇 혀끝에 피가 도네 (그림 : 하영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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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지렁이시(詩)/서안나 2016. 6. 5. 15:05
그는 기어가면서, 기어가서,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빨간 속살로 기어간 거리만큼 땅을 이탈한 죄만큼 흔적은 딱딱한 사랑이 되었다 그의 발바닥은 부르트고 죄가 많아 두텁다 썩을 만큼 지치도록 썩어 건널 수 있는 것들은 다 건넜다 이름과 귀와 눈동자를 지나고 비밀을 발설하던 입술과 혀를 지나 지저분한 하루를 건넜다 건넌다란 단어를 건넜다 생의 뒤편은 절벽보다 더 캄캄하다 사람들은 사랑을 너무 쉽게 말한다 사랑이란 몸이 먼저 다가가는 일 뜨거운 길바닥을 기어보면 안다 사랑은 낮아서 뜨겁고 더러운 것이다 (그림 : 강경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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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고구마를 삶으며시(詩)/서안나 2016. 6. 5. 15:03
고구마를 삶다 보면 제대로 익는지 젓가락으로 고구마를 쿡쿡 찔러보게 된다 나의 어머니도 열 달 동안 뱃속에서 키워 세상에 내놓은 잎사귀도 덜떨어진 딸년 잘 익고 있는지를 항시 쿡쿡 찔러보곤 하신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느냐? 차 조심해라 겸손해라 감사해라 고구마 푸른 줄기처럼 휴대폰 밖으로 넝쿨 져 뻗어 나오는 어머니 세상에 사나운 일 벌릴까 봐 40이 넘어도 설익은 딸년 마음과 영혼 병들지 말고 제대로 익으라고 핸드폰 속에서 쿡쿡 찔러보는 어머니 뜨거운 아랫목에서 뒹굴 거리며 알았다고요 귀찮은 듯 대답하는 뜨뜻하게 잘 익어가는 딸년 (그림 : 신재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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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애월(涯月) 혹은시(詩)/서안나 2015. 9. 19. 10:43
애월에선 취한 밤도 문장이다 팽나무 아래서 당신과 백 년 동안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서쪽을 보는 당신의 먼 눈 울음이라는 것 느리게 걸어보는 것 나는 썩은 귀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애월에서 사랑은 비루해진다 애월이라 처음 소리 내어 부른 사람, 물가에 달을 끌어와 젖은 달빛 건져 올리고 소매가 젖었을 것이다 그가 빛나는 이마를 대던 계절은 높고 환했으리라 달빛과 달빛이 겹쳐지는 어금니같이 아려오는 검은 문장, 애월 나는 물가에 앉아 짐승처럼 달의 문장을 빠져나가는 중이다 (그림 : 이영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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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매화 분합 여는 마음시(詩)/서안나 2015. 8. 29. 13:26
당신이 북쪽이라면 나는 북쪽을 향해 처음 눈을 뜬 누룩뱀 북쪽으로 돌아앉아 참빗으로 머리 빗어 내리면 연서를 쓰던 손가락이 쏟아진다 가고, 오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 버들눈썹 그리고 빈 배처럼 흔들릴 거라 방문 닫아걸고 더운 피 식히며 남은 꽃이나 피우는 늙은 투전꾼 같은 꽃나무 한 그루, 나는 백가지 꽃 중 으뜸인 매화 백분 곱게 발라 분합마냥 환해질거라 발목 없는 다리로 번져가는 꽃무늬들 당신의 그림자는 오른 쪽에 있었던가 왼쪽에 있었던가 당신의 노래는 콧노래였나 나에게 겹쳐졌던가 당신에게 흘러가는 나를, 상상해보는 거라 내 몸의 북쪽이 서늘해지네 당신을 잊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림 : 박연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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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황태에 관하여시(詩)/서안나 2014. 10. 30. 20:52
내 죄가 있다면 지상에서의 삶을 꿈꾼 것이다 퍼덕이며 육지의 힘에 닿고 싶었다 험준한 산령을 거슬러 올라 싱싱한 산 하나 알처럼 낳고 싶었다 진부령 덕장에는 하루 종일 눈과 바람과 얼음꽃의 고요함이 가득 차 있다 소금기가 흐려지는 내 혈관에서 두고 온 얼굴들이 조금씩 흘러나간다 나는 얼마나 그대들을 욕망했던가 움켜쥐었던 기억들을 하나씩 놓아버릴 때 슬픈 수식어들이 지워지고 백지처럼 넓어지며 나는 비워진다 산의 손길로 정결하게 요약되는 나의 생 불필요한 정신들은 절름거리며 내게서 다 떠났다 눈이 내리고 또 바람이 분다 죽음이 다시 찾아온다 나는 온몸이 크고 단단한 사리다 (그림 : 김정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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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동백아가씨시(詩)/서안나 2014. 5. 26. 19:30
야야 장사이기 노래 쪼까 틀어 봐라이 그이가 목청하나는 타고난 넘이지라 동백 아가씨 틀어불면 농협 빚도 니 애비 오입질도 암 것도 아니여 뻘건 동백꽃 후두둑 떨어지듯 참지름 맹키로 용서가 되불지이 백 여시 같은 그 가시내도 행님 행님 하믄서 앵겨붙으면 가끔은 이뻐보여 야 남정네 맘 한쪽은 내삘 줄 알게 되면 세상 읽을 줄 알게 되는 거시구만 평생 농사지어 봐야 남는 건 주름허고 빚이제 비 오면 장땡이고 햇빛 나믄 감사해부러 곡식 알맹이서 땀 냄새가 나불지 우리사 땅 파먹고 사는 무지랭이들잉께 땅은 절대 사람 버리고 떠나질 않제 암만 서방보다 낫제 장사이기 그놈 쪼까 틀어보소 사는 거시 벨 것이간디 저기 떨어지는 동백 좀 보소 내 가심이 다 붉어져야 시방 애비도 몰라보는 낮술 한잔 하고 있소 서방도 부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