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서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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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시(詩)/서안나 2014. 1. 20. 12:03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어주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일 햇살에 다친 무량한 풍경 불러들여 입교당 찬 대청마루에 풋잠으로 함께 깃드는 일 담벼락에 어린 흙내 나는 당신을 자주 지우곤 했다 하나와 둘 혹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회의 이치에 닿으면 나는 돌 틈을 맴돌고 당신은 당신으로 흐른다 삼천 권 고서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나갈 수 없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문장들이 다 젖었다 (그림 :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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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등시(詩)/서안나 2014. 1. 20. 12:00
등이 가려울 때가 있다 시원하게 긁고 싶지만 손이 닿지 않는 곳 그곳은 내 몸에서 가장 반대편에 있는 곳 신은 내 몸에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을 만드셨다 삶은 종종 그런 것이다, 지척에 두고서도 닿지 못한다 나의 처음과 끝을 한눈으로 보지 못한다 앞모습만 볼 수 있는 두 개의 어두운 눈으로 나의 세상은 재단되었다 손바닥 하나로는 다 쓸어주지 못하는 우주처럼 넓은 내 몸 뒤편엔 입도 없고 팔과 다리도 없는 눈먼 내가 살고 있다 나의 배후에는 나의 정면과 한 번도 마주보지 못하는 내가 살고 있다 (그림 : 정종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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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먼, 분홍시(詩)/서안나 2014. 1. 20. 11:59
윤이월 매화는 혼자 보기 아까워 없는 그대 불러 같이 보는 꽃 생쌀 같은 그대 얼굴에 매화 한 송이 서툰 무늬로 올려놓고 싶었다 손가락 두 마디쯤 자르고 사흘만 같이 살고 싶었다 혼자 앓아누운 아침 어떻게 살아야 매화에 닿는가 꽃이라는 깊이 꽃이라는 질문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배가 고팠다 매화는 분홍에서 핀다 분홍은 한낮의 소란스러움을 물리친 색 점자처럼 더듬거리다 멈춰 서는 색 새벽의 짐승처럼 네 발로 당신을 몇 번이나 옮겨 적었다 분홍이 멀다 먼, 분홍 (그림 : 전봉열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