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병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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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 독감시(詩)/이병초 2015. 12. 15. 22:13
변솟길이 어지럽다 두엄자리 눈 녹이던 햇살이 이마빡에서 쩔쩔 끓는다 친구들은 구렁이 같은 암칡 목에 걸고 신났을 거다 낫으로 토막 낸 암칡 이빨로 쭉 찢어 깨물 때마다 투둑투둑 터지는 알들 아구지가 물리도록 씹어댈 터이다 황방산 첫째 고개 눈이 소복한 데서 비료 푸대 타고 쌔앵 바루산 밑자락까지 미끄러질 터이다 문지방 잡고 일어섰는데 핑핑 어지럽다 함석차양 너덜거리는 살에 점점이 못 치는 소리 동치미 뜨러 가는 누님 고무신짝 끄는 소리 장독 뚜껑 미끄러지는 소리 댓잎 잦히는 소리 쿨룩거리는 목구멍에 그런 소리들이 섞인다 황방산(黃方山) : 전라북도 전주시의 효자동 · 동산동 · 팔복동에 걸쳐서 위치한 산이다(고도:217m). 여지도서(전주)에 서고산(西固山)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전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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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 전화시(詩)/이병초 2015. 9. 28. 22:53
날은 저물고 비까지 내리는데 울 엄니 전화도 안 받으시고 어딜 가셨나 밑 터진 비료 푸대에 목을 내고 양팔을 내어 비옷처럼 쓰시고 청닛날 밭에 들깨 모종하러 가셨나 고구마순 놓으러 가셨나 애리는 어금니 소주 한 모금 입에 물고 달래시며 거미줄이나 마중나온 길 허둑허둑 돌아오시나 큰아야, 집 뜯기면 어디로 간다냐 보상금 타서 아파트로 간다냐 제발 물 안 나는 디로 두어 칸 앉힌다냐, 물으시더니 하늘님께 물음 뜨러 가셨나 손주 새끼들이랑 언제나 함께 사냐고 날 받으러 가셨나 꺽꺽 목이 쉬어 빗발은 앞뒷발 다 들고 쏟아지는데 (그림 : 최정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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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 추석시(詩)/이병초 2014. 8. 15. 15:49
굵은 철사로 테를 동여맨 떡시루 어매는 무를 둥글납작하게 썰어 시루구멍을 막는다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호박고지 깔고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통팥 뿌리고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낸내 묻은 감 껍질 구겨 넣고 쌀가룰 한 둘금 그 위에 자식들 추석옷도 못 사준 속 썩는 쑥 냄새 고르고 추석 장만한다고 며칠째 진이 빠진 어매 큰집 정짓문께 얼쩡거린다고 부지깽이 내두르던 어매 목 당그래질 해대는 것이 무지개떡 쇠머리찰떡만은 아닌지 쌀가루 이겨 붙인 시루뽄이 자꾸 떨어지는지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어매는 부지깽이 만지작거리며 꾸벅꾸벅 존다 (그림 : 박재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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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 귀가시(詩)/이병초 2014. 7. 5. 18:14
지앗골 밭에 고추 지줏대 세우고 싸드락싸드락 돌아가는 길 황방산 머리에 눈썹달이 떴다 살가지는 눈 깜짝할 새 사람 목도 딴다는, 더 독한 놈은 사람을 죽여 놓고도 흔적을 지운다는, 감쪽같이 혼만 빼간다는 얘기가 자꾸 이마빡에 달라붙는다 닭이 없어질 때마다 그것 참, 그것참 할아버지는 당신 목을 매만지셨다 목 달아나고 간 빼먹힌 씨암탉 배를 갈라 알집을 꺼내시는 당신 뒤에 대숲 그늘이 흔들렸다 그 살가지를 옆에 끼고 눈 깜박할 새 밭고랑 너머로 사라졌던 족제비도 오소리도 옆에 끼고 다들 떠나갔어도 순정은 있다고 목마치는 눈썹달 함부로 흙살 트는 묵은밭 둔덕에 깔려 애 서고 싶은 눈썹달이 싸목싸목 따라붙는다 (그림 : 장용길 화백) 이 시는 1연과 3연이 현재이고 2연은 과거이다. 나는 현재 고추모를 지줏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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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 아자씨덜시(詩)/이병초 2014. 7. 5. 18:06
워떤 바람 든 무시 반토막 겉은 놈이 가난은 단지 불편헐 뿐이다고 생이빨 까냐엉 장도리로 콧구녁을 들어불랑게 뚫린 주딩이다고 구멍가게 라면땅만도 못헌 소갈머리럴 자꼬 씹어싸먼 자다가도 뱃구레에 창나는 벱이다엉 시방이 워떤 세상인디 이녁덜이 쪽박 차고 굶어 뒈져도 나넌 성공혀야 허는 오지디오진 세상인디 머시 어찌고 어쪄? 눈알 속에 눈알이 금방 튀어나올 것 겉은 일제 때 만주서 개 타고 말 장시혔다는 인공 때 총알이 핑핑 날어오는 디서 탄피 캐다가 휴전선 철조망 세우는디 보탰다는 쇳독 올라 장딴지 피나게 긁어대는 아자씨덜 흙손으로 막 문대불고 자픈 짜장발로 확! 목을 감아불고 자픈 징헌 세상 언지는 내 맘 꼴리는 대로 지대로 된 거시 있었냠서 골마리에 내 치상헐 돈은 진작 애께놨담서 느그는 앞이 훤혀서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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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 봄시(詩)/이병초 2014. 7. 5. 18:01
바람이 처마 밑을 쑤석거리는지 흙먼지 냄새가 맵다 빈 감나무가지 흔들리는 문창 편지지에 달래 냉이 싸랑구리 적어두고 손톱처럼 뜯어먹는 봄이다 미나리꽝에 일 붙인 덜덜덜 어금니 닳아 없어진 아재들이 저녁꺼리를 놓고 가고, 뙤똥허게 치대지 좀 말라고 형은 살이 통통하게 오른 싸이나 먹었다는 멧비둘기 몇 마리 던져두고 갔다 간에 심장에 덥적 올라붙었다는 벌떡증을 쓸어내리며 어쩌다 가랑잎처럼 배달되는 문 밖의 소식을 때 낀 발가락으로 펴보았다 제 손에 감춘 화투짝같이 감격적으로 붙여오던 눈빛들을 쥐약에 버무려두었으나 쥐새끼들은 시도 때도 없이 찍찍거렸다 얼레미로 채어 추려내고 싶은 것들이 많은 이른 봄이어서 바람소리가 사방에서 치통처럼 쑤셔댄다 뙤똥대다, 뙤똥거리다 : 작고 묵직한 물건이나 몸이 중심을 잃고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