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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초 - 귀가
    시(詩)/이병초 2014. 7. 5. 18:14

     

    지앗골 밭에 고추 지줏대 세우고
    싸드락싸드락 돌아가는 길
    황방산 머리에 눈썹달이 떴다

    살가지는 눈 깜짝할 새 사람 목도 딴다는,
    더 독한 놈은 사람을 죽여 놓고도 흔적을 지운다는,
    감쪽같이 혼만 빼간다는 얘기가 자꾸 이마빡에 달라붙는다
    닭이 없어질 때마다 그것 참, 그것참 할아버지는 당신 목을 매만지셨다 목 달아나고 간 빼먹힌 씨암탉 배를 갈라 알집을 꺼내시는 당신 뒤에 대숲 그늘이 흔들렸다

    그 살가지를 옆에 끼고
    눈 깜박할 새 밭고랑 너머로 사라졌던 족제비도 오소리도 옆에 끼고
    다들 떠나갔어도 순정은 있다고 목마치는 눈썹달
    함부로 흙살 트는 묵은밭 둔덕에 깔려 애 서고 싶은 눈썹달이

    싸목싸목 따라붙는다

    (그림 : 장용길 화백)

    이 시는 1연과 3연이 현재이고 2연은 과거이다. 나는 현재 고추모를 지줏대에 묶으러 밭에 와 있다. 앞산이 굴삭기에 파헤쳐졌고, 앞산자락에 옹기종기 터 잡았던 건너물 집들은 이미 딴 데로 이사 간 뒤였다. 그래도 버드랑죽-유제리 본 동네는 아직도 그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다. 앞시암도 아직 메워지지 않았고 윗겉이 아랫겉이의 골목길이며 구판장도 여전했었다. 그 때가 아마 내 나이 스물 대여섯이었을 것이다. 뒷동산 너머 가마굴 방죽 못 미쳐 지앗골 덕규네 밭고랑에 지줏대를 꽂고 고추모를 끈으로 묶었다. 밭은 넓고 일은 해도 해도 굴지 않으니 반복되는 노동의 지루함을 달랠 겸 자연스레 어릴 적 얘기를 꺼내들었다. 2연에 나오는 ‘살가지’는 살쾡이 즉 ‘삵’의 다른 말이다. 씨암탉 잡아먹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사람의 목을 따는 것은 물론 혼(魂)까지 빼간다는 말에 어린 나는 오금이 저렸고, 눈에 불을 켜고 삵이 덤벼드는 꿈을 꿀 때마다 이부자리에 오줌 재리기 일쑤였다. 내 집 뒤안은 시누대숲이었는데, 씨암탉이 없어졌을 때마다 할아버지는 대숲을 뒤져서 목 달아난 암탉을 찾아오시곤 했다. 암탉 배를 갈라 생기다 만 알을 꺼내시는 할아버지가 삵보다 더 무섭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 등 뒤에서 흔들리던 대숲 그늘이라니. 등하교 길에 문득 눈앞에 나타났다가 눈 깜박할 새 사라지곤 했던 ‘오소리’, 털이 값비싸다는 ‘족제비’ 얘기가 빠질 턱이 없다. 오소리로 담근 술은 골병든 사람에게 특효라 했고,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가 족제비고기라는 말도 빠지지 않았다. 우리는 코 흘리게 시절부터 어른들 어깨너머로 보았던, 들었던 그리하여 몸속에 기록된 말소리와 기억들을 현재의 욕망으로 재해석해내고 있었다. 말소리가 말소리들끼리 기억들끼리 어우러져 생성된 이야기는 시세에 맞든 안 맞든 우리에게 안온하게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놓고 있었다.
    우리는 일을 끝내고 일어섰다. 발길 닿는 곳마다 함부로 파헤쳐져 흉허물이 다 된, 고통스럽지만 아직 뜯기지 않은 탯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그때 황산머리에 눈썹달이 떴다. 이 시는 ‘눈썹달’이라는 이미지에서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고추밭에서 일을 다 끝내고 돌아가면서 이제 조만간 소멸되고 말 동네의 모습을 초승달빛에 비춰보고자 한 셈이다. ‘지앗골’은 일제 때 기와를 굽는 터였다는 데서 ‘기왓골’이란 지명이 생긴 것인데, 구개음화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지앗골로 불리어졌던 것 같다. ‘싸드락싸드락’이란 음성 상징어는 어딘가를 찾아가거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 여유롭게 걸어가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고, ‘싸목싸목’은 이 보다는 조금 바쁜 걸음의 모습을 나타낸 말이다. 삵, 오소리, 족제비 얘기를 옆에 끼고 돌아가는 우리들 곁에 눈썹달이 따라붙고 있었다. 목이 마르다 못해 목이 타들어가 목의 살끼리 마치는 듯한 갈증, ‘목마치다’는 말소리도 피차 실향민이 되어 발길의 가닥을 못 잡고 다시 목에 타들어갔다.
    문명화되다 못해 혼종적 다문화까지 한몫 거드는 현실에 ‘싸드락싸드락’, “대숲 그늘”, “목마치던 초승달”, “흙살 트는” 등의 시어나 시구가 왜 중요한 것인지, 내 몸에 기록된 이런 몸말을 통해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것인지는 나도 정확히 모른다. 윤흥길 선생의「장마」, 이문구 선생의「관촌수필」, 정양 선생의 뼈저린 토박이말 시편들을 읽고 눈물을 쏟았을망정 왜 이런 작품들이 내게 신음소리처럼 다가오는지, 이 작품들이 끈질기게 물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나는 눈물겹게 고민해보지 못했다. 그러함에도 나는 몸속에 기록된 형상을 찾아가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 같다. 문명화가 거듭되면 될수록 농경문화를 기억하고 있는 몸말의 추억, 부귀영화와 거리가 멀었던 사람들의 말씨며 입매며 모양새를 끄집어낸 성과물이 왜소해지리라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러나 물질문명과 관계가 없으되 관계가 분명한 이 작업은, 그러므로 물질문명과 뗄 수 없도록 이미 관계 설정된 내 시의 질서 속에 분명히 자리할 것이다.
    아침에 눈 뜨면 연장부터 잡아야 했고, 살가지 도깨비 귀신 얘기로 걸디건 입담으로 노동의 고통과 억울함을 달래야 했던, 하루 일을 마치고 싸드락싸드락 돌아가는 모습이 눈썹달에 비친 가난한 이웃들. 문명사회에 무시당하고 멸시받은 이들의 생활사 속에 나는 내 시가 지향하는 오랜 미래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몸의 기억회로에 저장된 몸말이 현재 욕망으로 재생되는 순간, 내 시가 과거회귀 또는 실향의식이라는 단어로 환기되지 않기를 바란다. - 이병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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