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문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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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저 할머니의 슬하시(詩)/문인수 2015. 6. 19. 14:55
할머니 한 분이 초록 애호박 대여섯 개를 모아놓고 앉아 있다. 삶이 이제 겨우 요것밖엔 남지 않았다는 듯 최소한 작게, 꼬깃꼬깃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귀를 훨씬 지나 삐죽 올라온 지게 같은 두 무릎, 그 슬하에 동글동글 이쁜 것들, 이쁜 것들, 그렇게 쓰다듬어보는 일 말고는 숨쉬는 것조차 짐 아닐까 싶은데 노구를 떠난 거동일랑 전부 잇몸으로 우물거려 대강 삼키는 것 같다. 지나가는 아낙들을 부르는 손짓, 저 허공의 반경 내엔 그러니까 아직도 상처와 기억들이 잘 썩어 기름진 가임의 구덩이가 숨어 있는지 할머니, 손수 가꿨다며 호박잎 묶음도 너풀너풀 흔들어 보인다. (그림 : 임종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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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만금이 절창이다시(詩)/문인수 2015. 6. 16. 12:52
물들기 전에 개펄을 빠져나오는 저 사람들 행렬이 느릿하다. 물밀며 걸어들어간 자국 따라 무겁게 되밀려나오는 시간이다. 하루하루 수장되는 길, 그리 길지 않지만 지상에서 가장 긴 무척추동물 배밀이 같기도 하다. 등짐이 박아넣는 것인지, 뻘이 빨아들이는 것인지 정강이까지 빠지는 침묵, 개펄은 무슨 엄숙한 식장 같다. 어디서 저런, 삶이 몸소 긋는 자심한 선을 보랴. 여인네들..... 여남은 명 누더기누더기 다가온다. 흑백 무성영화처럼 내내 아무런 말, 소리 없다. 최후처럼 쿵, 트럭 옆 땅바닥에다 조갯짐 망태를 부린다. 내동댕이치듯 벗어놓으며 저 할머니, 정색이다 "죽는 거시 낫겄어야, 참말로" 참말로 늙은 연명이 뱉은 절창이구나, 질펀하게 번지는 만금이다. (그림 : 성하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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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쉬시(詩)/문인수 2015. 6. 12. 21:54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 몸,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그림 : 하삼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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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밝은 구석시(詩)/문인수 2015. 6. 12. 21:51
민들레는 여하튼 노랗게 웃는다. 내가 사는 이 도시, 동네 골목길을 일삼아 ㅁ자로 한 바퀴 돌아봤는데, 잔뜩 그늘진 데서도 반짝! 긴 고민 끝에 반짝, 반짝 맺힌 듯이 여럿 민들레는 여하튼 또렷하게 웃는다. 주민들의 발걸음이 빈번하고 아이들이 설쳐대고 과일 파는 소형 트럭들 시끄럽게 돌아나가고 악, 악, 세간 부수는 소리도 어쩌다 와장창, 거리지만 아직 밟히지 않고, 용케 피어나 야무진 것들 민들레는 여하튼 책임지고 웃는다. 오십 년 전만 해도 야산 구릉이었던 이곳 만촌동, 그 별빛처럼 원주민처럼 이쁜 촌티처럼 민들레는 여하튼 본시대로 웃는다. 인도블록과 블록 사이, 인도블록과 담장 사이, 담장 금 간 데거나 길바닥 파진 데, 민들레는 여하튼 틈만 있으면 웃는다. 낡은 주택가, 너덜거리는 이 시꺼먼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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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미루나무시(詩)/문인수 2015. 6. 12. 21:43
저 동떨어지게 키가 커 싱겁다. 산너머 오십 리 밖 기적소리도 풍향(風向)도 일단 이 나무에 먼저 감겼다 풀렸다 사윈다. 비쩍 마른 자식, 허우대 껑충한 홀아비 같다. 장마철 여러 날 거꾸로 세워놓은 마당 빗자루 같다 유행가의 느린 몸 동작 같다. 휘파람 같다. 슬 슬 동구 밖까지 걸어나가 하염없이 길쭉한 저 마음 창공엔 기러기 한 줄 그걸 또 슬쩍 건드려 우그리거나 다시 펴기도 하면서 끝 간 데까지 지켜본다. 서 있는 시간의 오랜, 먼 길 같다. (그림 : 이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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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욕지도시(詩)/문인수 2015. 6. 12. 21:39
섬의 길들은 섬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유동마을 덕동마을 도동마을 대송마을 돌아오는데 내 마음도 꼬아 샛길 치며 꼬리 감추는 길 녹음 속 바람 아래 낮은 지붕들을 묶거나 등이 휜 만(灣)에 내려가 작은 고깃배들을 푼다. 혹은 후박나무꽃 향기의 숱한 파도 소리로 풀려서 그 노래가 밀어 올린 저 절벽 꼭대기 야생으로 나간 염소들이 몰래 몰려 있다. 섬의 길은 섬 안으로 되돌아간다. 욕지도 : 경상남도 통영시 욕지면에 딸린 섬 욕지도는 한려수도의 끝자락에 흩어진 39개의 섬을 아우르는 욕지면의 본섬이다. 통영항에서 직선거리로 27㎞, 뱃길로는 32㎞쯤 떨어진 망망대해에서 연화도·상노대도·하노대도·두미도·초도 등과 함께 연화열도(蓮花列島)를 이루고 있다. 면적이 14.5㎢에 해안선의 길이가 31㎞나 되고, 연화..